티스토리 뷰


[웹진 ‘날것’]18호 


연애가 제일 좋았어요. 

- 달밤 


나를 즐겁게 하는 것. 

웹진 ‘날것’의 주제가 한 텀을 돌고 나면 필진들이 모여 이번 글쓰기가 어땠는지 나누고, 다음 주제는 무엇으로 할지 의논하는 기획 회의를 합니다. 이번 주제는 ‘나를 즐겁게 하는 것’으로 정했는데요, 저는 무척 난감했습니다. 오래 지속하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세울 팬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고민하던 중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몇 년 전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을 때, 배구 경기를 보러 가거나 뮤지컬 공연을 즐기는 친구들에게 너희는 오래도록 지속한 취미가 있어서 좋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한 친구가 “그러게 달밤이 너는 20대 십 년간 뭐에 푹 빠져 지낸 거야?"하고 물었어요. 딱히 대답을 찾지 못하다가 무심코 뱉은 말이 “나는... 남자!”였습니다. 친구들도 저도 와하하 웃고 말았지요. 그렇게 없어 보이는 대답이라니. 한데 정말, 20대를 돌아보면 제가 가장 좋아하고 집착한 것은 바로 이성애 연애, 그 사탕 같은 로맨스였어요. 서른 중반이 된 지금도 여전히, 연애를 좋아합니다. 


 제 연애의 시작은 그리 순탄치 않았습니다. 나 좋다는 사람 마음에 안 들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게 관심 없는, 누구나 겪는다는 일들을 저도 겪었습니다. 거기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오래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고백해서는 퇴짜를 맞곤 했어요. 좋아하면 고백한다, 단순한 도식 뿐이기도 했고, 이론대로라면 여성으로서 일단 예뻐야 하는데 그건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성에게 주목받지 못하면서 선머슴처럼 일하는 청년1을 떠올려보세요, 무척 쉽지요? 그게 바로 20대 초반의 달밤 되시겠습니다.


 간절하면 이루어지는지 그러던 와중에도 용케 인연이 닿아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행복했어요. 첫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 당연히 남자 상대가 데이트 코스를 짜 올 거라 예상하고 설레던 저를 기억합니다. 상대가 척척 에스코트하면 저는 감동받은 표정을 지으며 행복해할 예정이었지요. 모름지기 데이트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웬걸, 코스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해맑게 뛰어온 상대를 보고 저는 얘가 왜 이렇게 철이 없을까, 나를 무시하는 건가 싶어 혼돈의 카오스에 빠져들었습니다. 나를 좋아한다면 이 남자가 이렇게 행동할 텐데 원 투 쓰리, 그러면 나는 이렇게 나가야지 원 투 쓰리. 연애는 이제 시작하는 거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서로 의논하거나 협상할 틈도 없이 저는 저만의 각본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뻔하디뻔한 이성애 연애의 낭만적인 각본이. 


 그때 상대와 저는 데이트 통장을 썼습니다. 매달 일정한 금액을 한 통장에 넣고, 체크카드를 두 개 만들어 나눠 가졌지요.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는 등 일체의 비용을 그 카드로 결제했습니다. 연애를 지속하는 한 만남엔 비용이 발생할 텐데 때마다 긴장하는 게 싫어 제가 제안한 방법이었어요.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허점은, 공동의 재산을 만들어 데이트 비용을 쓰면서도 실제로 대금을 결제하는 행위는 남성 파트너에게 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밥을 먹고 나서도 결제는 남성이, 영화를 볼 때도 결제는 남성이 했어요. 카드는 둘 다 가지고 있는데 말이에요. 예산을 공동으로 마련해서 둘 사이에 경제적인 긴장을 없앤 시스템이지만, 밖에서는 마치 남성이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양 보이게 했습니다. 남성이 비용을 지불하는 데이트의 외양을 갖췄다고나 할까요. 돈을 써가면서 남자를 만나는 여성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성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는 여성으로서 가치 있게 존중받고 싶었어요. 모르긴 몰라도 남들에게 보이는 걸 넘어서 제가 꿈꾸는 로맨스의 각본을 연기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연애 흑역사를 너무 풀었나요, 저는 위에서 반복한 이성애 연애의 각본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데이트 코스는 남성이 짜고 여성은 리액션 한다, 비용은 남성이 지불한다, 그래야 여성으로서 존중받고 사랑받는 느낌이 들며 자존감이 올라간다, 이 알레고리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보통 젠더화된 연애 각본은 남성이 경제를 담당하고 여성이 그것에 상응하는 ‘몸’을 가꾸는 것으로 수행됩니다. 이 과정들은 소비적인 놀이를 통해 로맨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고, 이 때문에 젠더 위계가 드러나지 않음은 물론 연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지요. “젠더 각본을 따르는 프로젝트로서의 이성애 연애에서 로맨스라는 목표는 연애 당사자들이 가장 남성다울 때와 가장 여성다울 때, 즉 젠더 각본을 가장 충실하게 이행할 때 극대화된다”고 합니다. (나임윤경, <이성애 연애와 친밀성, 드라마처럼 안되는 이유>, 『젠더와 사회』, 동녘) 그러니까 남자가 더욱 남자답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할수록, 여자가 더욱 여자답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할수록 연애가 로맨틱하다고 느껴진다는 거예요. 이 과정은 지극히 사적이고 친밀해서, 젠더 위계, 즉 연애 관계가 자리하는 성차별적인 구조를 볼 수 없게 합니다. 이 구도는 남성의 재화와 여성의 몸이 교환될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끝까지 밀고 나가면 성매매 과정의 섹스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어요(허걱!). 같은 구도의 다소 부드러운 버전이라면 어떨까요. 남성의 능력과 여성의 아름다움이 교환되는 이성애 시장, 여성의 미모를 남성 능력의 증명으로 사용하는 트로피 아내 등이 그렇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는 돈 없는 남자라도 신앙이 능력으로 치환되어 교회 오빠로서 추앙을 받는 ‘전도사 마누라는 다 예쁘다네’(신정은 작사작곡, 싱잉앤츠/ 신앙-능력과 여성의 미모를 교환하는 문화 콘텐츠로 언급되며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심지어 결혼식 축가로 이 노래를 부르는 영상도 봤음) 같은 곡이 있지요. 남성의 신실함과 그 보상으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여성의 미모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지금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진행하고 있는 2018 기획강좌 <성폭력 입체적으로 읽기> 1강에서 전희경 님은 친밀한 관계의 ‘친밀함’을 분석해 보자며 “왜 불평등해야 로맨틱할까?”를 질문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로맨스 학습’을 소개하면서 여성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로맨스를) 원하게 하는 교육이라고 말했어요. 자발적으로 원해서 기쁘게, ‘여자’가 되어가는 과정인 거지요. 실제 나와 너의 신비한 감정과는 상관이 없는, 외부적 문법을 학습하고 받아들여 자발적으로 원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내면화된 로맨틱한 각본이 사실은 얼마나 사회 정치 경제학적인지 고민해보자는 요청이었어요. 요는, 나를 즐겁게도 하고 울게도 했던 이 로맨스가 실은 철저히 가부장적인 문법 안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학습의 효과라는 거였습니다. 상대가 이렇게 하면 사랑받는다고 느끼고, 내가 이렇게 하면 더 사랑받을 수 있겠지 생각한 이성애 연애의 뻔한 기제들이. 


저는 저의 연애와 결혼 제도 안에서 이성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을 접하고 활동하며 일상에서 맺는 관계를 바꿔보려 노력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스민 욕구를 해체하고 바꾸기란 쉬운 게 아니지요. 다만 내 욕망이 왜 이렇게 형성되었는지 분석하고, 로맨틱한 이 외부적 문법이 성차별을 강화할 뿐 아니라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망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관계의 주체가 각각 소외되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신앙의 지평으로 넘어올 때,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맺기와 이어질 때, 우리의 방식은 또 얼마나 어떻게 바뀌게 될지 상상하는 일도요.



믿는페미 웹진 '날것'은 매주 목요일 발행됩니다. 이번 웹진은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필진들의 즐거움을 펼쳐내고자 합니다. 필진들의 즐거움이 이 글을 읽는 믿는페미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