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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날것']19호 


안녕하세요. 기독교인이고 BL 좋아합니다. 그럼 20000.

- 새말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은 여러 가지이다. 사람 만나기, 노래하기, 연극하기, 새로운 무언가 배우기, 여행, 맛있는 음식, 술, 파티투나잇 등등. 하지만 하나를 진득하게 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10년 이상 꾸준하게 좋아한 일을 말해보라고 하면 두 가지 정도이다. 하나는 예수 만나기(오글) 그리고 또 하나는, 여기저기 말할만한 취미는 아니라 민망하지만, ‘BL 소설’ 읽기.


  요즘은 많이 대중화되어서 BL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아마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BL(boy’s love)은 남성과 남성의 사랑을 다룬 장르이다. 10대 소년들의 사랑을 그리는 장르라는 뜻으로 BL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지만, 요즘은 캐릭터의 나이에 상관없이 BL로 분류하는 추세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장르인 ‘퀴어물’과 구분되며 판타지에 가깝다. 로맨스 장르가 현실 이성애 연애와 거리감이 있고, 판타지를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여성들이 주로 창작자이자 소비자가 되는 장르여서 예전에는 ‘여성향’이 BL을 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BL 만화, BL 소설, BL 게임 등 다양한 분야가 있고, 영화나 만화를 보고 등장인물에 대해 BL로 2차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일본 BL 만화나 소설이 많이 번역되고, 일본애니메이션이 주로 소비되었을 때에는 ‘야오이’라는 단어를 한참 사용하기도 했다. 상업으로 나오지 않고 물밑에서 만들고 소비하는 창작물이라고 해서 ‘동인지’라고 불렀고, 그것을 창작 및 소비하는 여성을 ‘동인녀’라고 칭하기도 했다. 근 몇 년 사이 바야흐로 ‘대 이북(e-book) 시대’가 열리며 음지에 있었던 BL소설이 대거 상업 이북으로 출판되었다. 몇몇 플랫폼에서 소설과 웹툰도 활발하게 연재되고 있어 접근성도 높아졌다.


  나는 12살 때 처음으로 BL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는 한참 인터넷소설이 유행했다. ‘늑대의 유혹’, ‘그놈은 멋있었다’ 같은 인터넷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소설 카페에 가입해서 온갖 인터넷소설을 섭렵했다. 비슷한 스토리, 비슷한 연애 구도에 질려갈 때쯤 자주 가던 카페의 다른 게시판을 우연히 클릭했다. ‘동성 소설’ 게시판이었다. 유레카. 신대륙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 후 미성년자가 가입할 수 있는 소설 커뮤니티인 소위 ‘공개동’에 가입하기도 했고, 웹 소설 플랫폼을 서성거리기도 하였으며, 만화를 본 후 꽂히는 남남 커플의 2차 창작물을 찾아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치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성인인증이 필요한 비공개 커뮤니티에 가입하여 소설을 보았고 최근에는 이북을 구매하고 있다. 고된 하루를 보낸 후 늦은 밤 침대에 누워 BL 소설을 읽으며 하루를 마감하는 일이 나에게는 휴식이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다. 10년 이상 거의 매일 소설을 읽어왔다. 10대였을 때에는 지금까지 이럴 줄 몰랐는데. 아마 30대, 40대에도 계속 이 장르를 좋아하지 않을까?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여기고, 혐오한다는 사실은 중학생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물론 현실의 동성애와 BL 장르는 다른 분야이지만, 만약 동성애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라면 남성 간의 사랑을 다룬 장르인 BL을 기독교인인 내가 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성애 이외의 사랑이 가능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동성애가 죄라는 논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는 근거를 찾기 위해 떠돌았으나 성소수자를 배척하는 성경해석이 대부분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책을 통해 성소수자를 정죄하지 않는 신학적 가능성에 대해 배웠고 마침내 내가 즐거워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버리고 자유함을 얻었다. 나는 오랜 질문의 답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BL 소설의 어떤 부분이 나를 이렇게나 끌리게 만들었을까? ‘사랑’이라는 감정은 흥미롭고 강렬해서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사랑을 하고, 소설, 영화, 음악의 소재로 삼는다. 나 역시도 사랑과 사랑의 스토리에 흥미를 느낀다. 다만 BL 소설에서는 사랑을 할 때 여성다움, 남성다움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기에 나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BL에서도 남성 역할과 여성 역할의 공식이 있기는 하다. 성관계 시에 삽입하는 쪽을 ‘공(攻, 공격)’이라고 부르고, 흡입하는 쪽을 ‘수(受, 수비)’라고 부른다. 성관계 시 공과 수가 계속 바뀌는 작품이 있기도 한데, 그것을 ‘리버스(reverse)’라고 부른다. 하지만 대중적인 취향은 아니고 ‘신리멸(신이시여 저 리버스를 멸하소서)’이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공과 수를 확실히 하는 일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서양에서는 한국이나 일본보다는 그 경계가 모호하지만, 한국에서는 보통 창작물에서 공수를 명확히 표기하고 리버스 여부를 미리 알린다. 비록 공과 수의 경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 스펙트럼은 무척 넓다. 가부장적 남성성에서 벗어난 울보공, 연하공, 미인공이 있기도 하고, 공보다 능력이 뛰어난 수, 권력이나 돈이 더 많은 수가 있기도 하다. 공과 수 사이의 키 차이가 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육체적 힘이 비슷하거나 수가 더 강한 경우도 많다. 두 사람의 관계가 동등하게 여겨지고, 두 사람이 아닌 경우도 있다. 특정한 각본을 따르지 않아 다양한 경우의 수가 존재하며, 색다른 캐릭터와 스토리는 새로운 취향이 되어 그를 선호하는 그룹을 만들어낸다. 나는 다양한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BL 소설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섹스이다. 성관계를 묘사하지 않는 플라토닉 소설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섹스 장면이 포함된다. 섹스에 대한 다양한 상황과 방법이 자세하게 묘사된다. 여성들은 그것을 쓰거나 보며 즐기고, 댓글과 리뷰 등으로 섹스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BL 소설 커뮤니티가 활발하던 르네상스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미성년자가 볼 수 있는 곳에 음란물을 게시한다는 이유로 많은 곳이 폐쇄되었다. 그 뒤 많은 커뮤니티들은 주소 유출을 금지했고, 성인인증을 철저히 했다. 신규 회원가입을 비정기적으로 드물게 받거나, 회원 추천제로 가입을 받는 식으로 폐쇄성이 강해졌다. 그럼에도 많은 사이트가 신고 당했고, 없어졌다. 그것을 당시에 ‘마녀사냥’이라고 불렀다. 나는 궁금하다. 미성년자가 쉽게 포르노를 접할 수 있는 사이트, 기사만 봐도 수없이 뜨는 성인광고, 남성이 욕망하는 것들을 쓰는, 그리는, 심지어 실제로 여성 대상 범죄가 일어나는 사이트는 왜 사라지지 않는지. BL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욕망을 쓰고 읽는 장르였기에 규제당해야 했다. BL은 저평가되었고, 좋아한다고 밝힐 수 없었고, 음지에서만 소비할 수 있었다. 근 2~3년 사이 BL 장르 상업 시장이 꽤 넓어졌는데 한국에 페미니즘이 이슈화된 시기와 겹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도 궁금하다.


  BL 소설은 창작자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 주로 웹에서 연재된 후 출간되기 때문에 댓글로 활발하게 소통하고, SNS로 소통하기도 한다.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 인식이 빠르게 변하고 있으므로 의견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소설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 안에서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폭력적인 관계도 취향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지. 또는 이제까지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한 대중문화는 많았는데 왜 남성을 성적 대상화 하면 안 되는지, 수많은 여혐 콘텐츠는 넘어가고 BL에만 기준을 제시하는 건 옳은지, 욕망을 검열해야 하는지 등등. 다양한 의견 속에서 BL 장르는 역동성을 가진다. 변화 속에서 옳은 소비에 대해 생각하며 나는 오늘도 즐겁게 BL 소설을 읽는다!



믿는페미 웹진 '날것'은 매주 목요일 발행됩니다. 
6주간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필진들의 즐거움을 펼쳐내보았습니다. 저희의 글을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 부터는 '몸'을 주제로 찾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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