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웹진 '날것'] 2018-4호.
다시 찾고싶은 명절
- 소네치카



​<내 명절>
“저 올 해 스무살이에요.”
열아홉에서 스무살이 되던 송구영신예배에서 마주치는 낯익은 얼굴들에게 ‘안녕하세요’ 대신 그렇게 인사했다. 주일학교를 제외하고는 그 교회에 가장 어린 사람이 줄곧 나였다. 중고등부 담당 전도사님은 나를 가리키며 핏덩이 잘 챙기라고 언니들에게 말하곤 했다. 교회에서 나는 미워도 사랑받는 막내딸 소네치카였다.
추석이나 설날은 외로웠다.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이 반갑기는 했지만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라는걸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울증이 심했던 몇 년 간은 누가 오던 얼굴만 슬쩍 비추고 내 방에 틀어박혀있었다. 나 아주 어릴 적 이후로 내 집에는 제사도 없었으며 큰 집으로 가는 일도 없었다. 오랜만에 본 삼촌과 고모 두 사람이 내게 용돈을 준다는 것 말고는 명절이 내게 무슨 의미였는지 모르겠다.


송구영신예배는 내가 좋아하는 예배였다. 나의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한 해를 기대하기에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새해 기도제목을 쓸 적에는 소원이 이뤄지는 꿈을 꿨던 것 같다. 막상 해가 끝나갈 즈음에는 어떤 기도제목을 썼는지도 잊었기에 소원들이 이루어졌는가는 알 수 없다. ‘올 해 내게 주신 말씀’카드를 뽑을 적에도 많이 설레었다. 하나님께서 당장이라도 나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주실 것 같았다. 사실 새해 기도제목이나 말씀카드의 의미는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아무것도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한채로 교회를 다녔다. 그래도 좋았다. 나는 성경 속 모든 이야기들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해석에 오해가 있을지언정 모든 진리가 그 안에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믿고있다. 나는 똑바로 살고싶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려줄 무엇이 필요하다. 내게 괜찮다고 한 번이라도 더 말해줄 무엇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내가 나쁜 사람으로 살았어도 나를 가리켜 나쁘다고 하지 않으셨다. 가족들도 내게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기껏 키워주고있는 가족들을 미워하는 확실히 나쁜 아이였다.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원망 속에 자라난 것만 같다. 내 평생 가족들을 미워했다. 주 양육자였다 할 수 있는 할머니를 가장, 지독하게 미워했다. 아빠에게 얻어맞고서 경찰을 부른 날, 경찰들을 돌려보내려 거짓말을 하고 되려 나를 나무란 것이나 내게 언질 한 번 없이 정신과 폐쇄병동에 강제 입원을 시켜서가 아니었다. 다섯 살 즈음 할머니와 처음 갔던 뷔페에서 접시에 스파게티만 잔뜩 담아왔을 때, 사람들과 함께 나를 비웃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손목을 돌리던 버릇이 생긴 것을 따라하며 장애인같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백화점에 나를 데려간 날 옷 사이즈를 묻는 직원에게 대답하는 대신, 내게 옷 사이즈를 물었기 때문이었다. 매번 남이 사다주는 옷이나 물려준 옷만 입던 내가 내 옷 사이즈를 알았을 리 없는데, 할머니는 그걸 몰랐다. 그게 뭐라고 나를 너무 아프게 했다.

교회라고 그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나는 날카로운 말을 잘 뱉었고, 애교도 없었다. 사랑할 구석이 없었던 것으로 그 때의 나를 기억한다. 그래도 나를 계속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단 한 명이 아니었고, 여럿이 있었다. 처음 스탭으로 섬겼던 복음캠프에서 대표 목사님께서 내 자해 상처들을 보고 그 날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했다. 후에 그 교회에 등록하고서 이 일 저 일 맡다가 힘들다고 몇 달 잠수를 탔다. 일을 버티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보다 잠수를 탄 것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커질 때 즈음 다시 교회에 갔다. 사모님은 나를 안으며 돌아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당당 할 수 없는 일로 오만원짜리 몇 장을 벌었을 때, 사모님에게 털어놓았다. 사모님은 내가 흘릴 수 없는 눈물을 보였다.
연약한 우리는 모두 서로를 서툴게 대하지만, 그 안에 오고가는 사랑이 있다. 내게 교회는 기대할 수 있을거라 생각도 못했던 사랑들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교회에 가지 않고, 예배도 드리지 않은 채 벌써 반년이 흘렀다.


​<순결이요? 여기서요?>
섹스 몰카 피해 경험을 털어놓으러 오래 다녔던 교회의 사모님을 찾아봰 적이 있다. 그 교회가 있던 동네가 내 동네였으며, 몰카 가해자가 살고있는 동네였다. 그 날 몰카 가해자를 길에서 마주쳤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였다. 나는 얼어붙어 멈춰섰고, 그는 가족들과 함께 가던 길을 걸어가며 몇 번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무기력히 앉아있다가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소문이라도 퍼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모님께 연락을 했었다. 사모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서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건데 그걸 그렇게 버렸냐 물었다. 나는 잔뜩 화가 나서 제가 잘못한거니까 고소 한 것도 무르고 그 남자한테도 사과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사모님은 사과는 고소 다 끝나면 하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급히 마무리짓고 인사하며 떠나는 내게 사모님은 “사과는 꼭 고소 마무리되면 해.” 그렇게 말했다. 순결을 버린 죄인인 나는 그날 자살시도를 했다. 결국 살아서 그 사모님께 당신 실수하셨다는 카톡도 보내고 지금 이 글도 쓰고있다.

거의 자해하는 심정으로 끊임없이 남자들을 만났던 적이 있다. 한달동안 스무명의 낯선 남자들을 만났다. 누군가와는 식사만 했으며, 누군가와는 이야기만 나누었으나 대부분은 모텔에서 만났다. 이런 나를 바꾸고싶어 목사님에게 상담을 부탁했다. 내 자해 상처에 눈물로 기도했다는 목사님이었다. 그는 내게 순결한 사람의 결혼생활의 장점들을 나열하며 지금의 나는 누구에게도 배우자로 소개시켜주고싶지 않다고 말했다. 새벽까지 길게 이어진 그 대화는 “언제든 연락해”라는 목사님의 다정한 말로 마무리되었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문란한 배우자가 손목을 긋는 배우자보다 나쁜가. 나는 꼭 누구의 배우자로서 자격이 있는지로 나쁘다는 평가를 받아야할까.
그래도 하나님을 미워하지 않는다. 목사님 개인의 문제이지, 순결이 가치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 나는 문제 없는 개인을 어디서 찾는가. 문제 있는 개인에게 건의하고 함께 바꾸기를 원했다.

어디로 가야 있는지 모를 낙원을 찾기보다 내가 있는 곳이 낙원이 되길 기대하자고 결심하기까지, 그리고 기대를 건의로 옮기기까지 또 몇 달이 걸렸다. 너무 긴 대화를 했던 것 같다. 목사님은 내게 네가 사랑하는 아이가 여성을 혐오한다면 어떻게 대처할지 물었다. 나는 그 아이의 주변을 보겠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아이를 강하게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여성혐오를 혐오하는 소네치카였다. 나는 더이상 강해지고싶지 않았다.

“저도 정답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걸 함께 찾아가면서, 알고있는 범위의 연약함들만큼은 다 배려하면서 설교를 해주시면 안될까요?”
내 물음에 목사님이 대답했다.
“그럼 나는 설교를 두시간씩 해야돼.”
이 대화를 마지막으로 나는 교회를 갈 용기를 잃었다.


​<다시 찾고싶은 명절>
작년 봄에 가족들과 절연했다. 나를 너무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잃고 홀로 섰다. 아르바이트만 여러개를 하다가 교대 근무를 하는 직업을 가졌다. 신앙심을 가진 이후 올 해 처음으로 송구영신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12월 31일의 마감 근무는 1월 1일의 자정을 삼십분 넘어까지였다. 만약 일이 아니었으면 송구영신예배에 갔을런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낯 익은 얼굴들 보며 인사를 나누고, 또 한 해를 돌아보며 기도제목을 쓰고, 안수기도를 받고 훈훈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누구들의 표현을 빌려, ‘하나님을 떠난 삶’에서 나는 행복하다.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을 안고, 나 자신을 의심하면서도 잘 살아가고있다. 힘든 날이면 속으로 몇 번씩 되뇌인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분명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해주실 것이다. 하지만 목사님이 내 상태를 꼬집어 잘못되었다고 말 할 때, 설교중에 혐오발언을 할 때, 그 때도 하나님이 나를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씀해주실 거라 믿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오늘도 나는 연약하다.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라는 교회 안에서 페미니즘을 증거하며, 그 동시에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증거할 꿈을 꿀 자신이 없다. 연락 할 가족 한 명 없이 추석과 설날이 한 번 씩 지났다. 송구영신도 한 번 지났다. 내 교회에는 사람들만 있지 않았다. 내 하나님이 있었으며, 찬양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그 안에 혐오 발언이 귀에 콕콕 박히는 것이 힘들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존재를 욕되게 하는 것을 견딜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다시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다시 성경을 폈을 때 다짐하게 될 것이 ‘완벽한 탈신앙’일까 두렵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