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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날 것]
2018-특별호. 

성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 유민

믿는페미의 이번 사연 주제가 “혼전순결과 섹스”라고 하니 꼭 사연을 적어 보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이 주제로 사연을 쓰기 전에 읽어보고 싶은 책도 있어서 서점에 왔지만 내가 찾는 ‘낙태’관련 책은 다 재고가 없다. 지역 여성민우회에 전화해봤더니 <있잖아, 나 낙태했어> 라는 책을 대여해주실 수 있다고 한다. 민우회에 가서 읽어봐야겠다. 

어떤 얘기부터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은 내 경험을 먼저 써보려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에게 사귀자고 했던 고등학교 1학년의 축구부 오빠는 자기 집으로 나를 불렀고, 어두운 방에서 키스를 했다. 키스 경험은 있었기에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그는 손으로 내 가슴을 만지고 바지와 속옷 안으로 손을 넣어 성기를 만졌다. 거부하고 싶기도 한데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치원 때부터 “싫어요 안돼요 하지마세요”를 배우긴 했지만, 그건 아주 나쁜 아저씨가 내몸을 만질 때만 그런 거 아니었나? 남자친구인 경우에도 그렇게 해도 되나? 분위기 망치는 거 아닌가? 그런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기 친구들은 다 섹스를 해봤다며 나에게 한번만 섹스를 하자고 했다. 나는 섹스는 싫다고 했고 여러번 나에게 섹스를 하자고 했지만 내가 싫다고 하니 나를 집에 보내주었다. 그리고 곧 그에게 이메일로 이별 통보를 받았다. 학업에 열중해야 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지만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친구가 생겼다. 섹스를 목적으로 나를 사귀고 섹스를 거부하니 헤어진 것이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하게 됐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엄마랑 언니랑 찜질방에 갔고, 수면실에서 잠들었는데 이상한 느낌에 잠에서 깼는데 어떤 아저씨가 내 성기에 손을 넣고 만지고 있었다.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반항하지 못했다. 내가 몸을 뒤척이니 잠시 멈췄다가 다시 또 나를 만졌다. 그 뒤로 어떻게 그 수면실에서 나오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또다른 아저씨 한분이 ‘아니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뭐하시는 거냐구요.’ 라고 해서 무마된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나는, 내 몸을 내가 만져보고 알아보기도 전에, ‘아는 남성’, ‘모르는 남성’에 의해 ‘성’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집 근처에 미션스쿨이 있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션스쿨 중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그리고 보건시간에 성교육을 받았는데 엄청 충격을 받았다. 여자의 질 속으로 집게 같은 가위를 넣고 태아의 온 몸을 찢어버리고 태아의 시체를 자궁 속에서 다 긁어내는 것이 낙태라고 배웠다. 동영상도 시청했는데 자궁 안에서 가위를 피해 달아나는 태아 모습이 그려진 동영상이었다. 불끄고 커텐도 쳐서 (꼭 그런 어두운 환경에서 성교육이 이루어져야만 했을까? 의문이다.) 깜깜한 교실에서 그 동영상을 봤는데 진짜 큰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은 말했다. 생명은 소중하기 때문에 낙태는 해서는 안 된다고. 그래서 난 그때 결심했다. 내가 미혼모가 되더라도 임신을 하게 된다면 그 아이는 낙태하지 않고 키우겠다고. (이 굳은 결심은 이후에 내 인생에 큰 영향력을 주게 됐다.)

나중에 알았다. 그 동영상은 조작된 동영상이었고 잘못된 성교육이었음을. 우리나라는 생명의 소중함을 얘기할 때 늘 여성을 배제한다.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선택’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을 보면 ‘생명’이 훨씬 무거워 보일 수밖에 없다. 양적 비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태아가 혼자 살아갈 것도 아닌데. 여성의 선택권이라고 말하는 순간, 선택을 둘러싼 수많은 조건과 경험은 삭제되고 단편적으로 이해되기 쉽다. 당사자의 경험은 전혀 배제된 상태에서.... 삶의 맥락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이 학교 성교육에서 낙태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가를 보면 여성의 경험에 너무나 무관심한 것 같다. 또한 우리나라의 법은 태아만이 아니라 이미 태어난 인간에 대한 생명도 절대적인 보호를 상정하고 있지 않다. 왜 여성의 권리는 사적인 것이고 아이의 권리는 공적인 것이 되는지 의아하다. “내일의 주인공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주세요”라는 구호를 대중교통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여성을 인구 생산을 위한 도구로만 이야기하는 나라 그리고 종교가 만나서 더 성공적인 구도를 이끌어 가는 것 같다.

문화적으로 숨김을 강요받거나 비난받는 낙태는 ‘미/비혼’의 경우이다. 미/비혼의 여성이 임신중단 경험을 숨기고 싶어하는 주된 이유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섹스를 했다는 증거라서 그렇다. 이런 것들은 여성 혐오에 기인하고 있다. 남자의 섹스는 본능,쾌락을 목적으로 하지만, 여자의 섹스는 음지 영역에 남아 있다. 여자의 임신중단에 대한 비난은 생명살해에 대한 비난만은 아니라 ‘몸을 함부로 굴렸다’라고 표현되는 성적인 문란함과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기혼여성의 임신중절이 더 높다고 한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몸이 안 좋거나, 터울조절을 위해서 임신중절을 하는 경우가 많다. 주변사람들과 상대적으로 공공연하게 경험을 공유하기도 한다. 그럼 왜 사람들은 기혼여성의 임신중절에 대해서는 용인하는 걸까? 결혼이란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임신중절은 괜찮은 건가? 

우리 사회에 임신중절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도 있는 것 같다. 데프콘, <그녀는 낙태 중>이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성적으로 문란하고 부도덕하고 생각없는 젊은 여자 사람의 낙태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잠을 자 더러워진 내 몸의 상처는 언제쯤 아물까? 눈을 뜨면 다시금 담배를 찾는다 혼자서 익숙하게 미역국을 담는다 그녀는 올해 낙태만 벌써 두 번째 / 화장을 떡칠하고 벽지를 꽃칠하고 오빠들 보시라고 싸구려 똥꼬 치마로 실수를 가장한 그 팬티 보여주기란 명품 백을 위한 현실의 아픔인가? 익숙해진 임신 앞에 첫 마디가 씨발! 필 받아서 콘돔을 뺀 새끼도 씨발!]  이런 류의 인식은 낙태죄에 관련된 포털사이트의 기사의 댓글을 보면 볼 수 있다. “섹스를 즐겼으면 결과도 책임져야지” “몸을 함부로 굴려서 미래의 남편한테 떳떳할 수 있겠냐” 등등...  모자보건법 시행령에서 말도 안 되게 느껴지는 조항이 ‘배우자 동의’ 조항이다. 몸 함부로 굴려서 미래의 남편에게 미안하지도 않냐는 인식과 배우자에게 동의를 받아야만 임신중절을 할 수 있다는 조항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나는 낙태죄 폐지 운동에도 참여했다. 피켓을 들고 함께 구호를 외쳤다. 낙태죄 폐지 반대 서명운동을 적극 동참하는 교회에서 알면 아마 엄청 논란이 될 만한 일이다. (사역하는 교회에서 이 사실을 알면 당회에 불려갈 수도 있다.) 

6월17일에 서울시청에서 생명사랑집회를 했고 그곳에는 낙태하는 여성들에 대한 못마땅한 시선이 존재했다. 그러나 과연 여성들에게 쉬운 결정이 있을까? 임신테스트기를 보자마자 두 줄을 확인하고 3초 만에 중절수술을 해야겠다고 결정했다면, 빠른 결정은 쉬운 결정인가? 이것에 대해서 숙고할 수 없는 여지가 없음이 과연 나의 선택인가? 내가 이걸 쉽게 결정했다고 비난받을만한 일인가? 결혼하지 않은 20대 여성이 임신해서 출산하고 아이를 잘 양육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인가? 결혼을 한 여자라도 임신하고 출산하면 경력단절이 되는 사회인데, 임신중절 행위 자체가 몸에 그다지 좋을 것이 없고 비용도 들고 사회적으로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행위인데, 3초 만에 수술해야겠다는 확신이 드는 것은 그 여성의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문제의 결과일 수 있다. 큰일이니 만큼 여러 선택지를 두고 숙고해서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무작정 덮어두고 여성을 비난할 일이 아니다. 

 교회 내에서도 그저 ‘생명의 소중함’만 운운하지말고, ‘많이 낳아야 전도하는 것’이라는 폭력적인 말만 하지말고, 여성의 몸과 권리에 대해서도 제발 공부하고 깊게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다시 내 이야기를 이어나가자면, 중학교 때 친구따라 집근처 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고등학교 1학년 수련회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너무 감격스럽고 행복했다. 그런데 믿음이 생기고 난 뒤에 자꾸 죄책감이 밀려왔다. 수련회에 가서 기도할 때마다 중고등부 전도사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모두 고백하라고 하셨다. 그때마다 내 몸이 더럽혀졌던 것 같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찜질방에서 아저씨가 내 성기를 만졌던 일, 축구부 오빠가 내 몸을 만지고 섹스하자고 했더 일,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키스를 하고 서로의 몸을 만지고 흥분하고 그랬던 일들.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이전에 일어난 일들이라 어떻게 ‘죄씻음’이 될까하는 고민이 내 안에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언제나 우리몸을 ‘정결’하게, ‘순결한 신부’로 지켜야 한다는 비슷한 말을 계속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나 빼고 모두 다 깨끗한 사람들 같았다. 그런 기도를 할 때마다 너무 괴로웠다. 난 이미 더러운 몸인데 어쩌지? 하나님이 이런 나도 기뻐하실까? 답답한데 어디 말할 데가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해 점수맞춰 신학대학교에 갔고, 하나님은 믿었지만 남자친구를 사귀면 키스도 하게 되고 애무도 하게 되고 성기결합 섹스도 하게 됐다. 나는 섹스가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는 채플시간 ‘순결서약’이라는 걸 했다. 순결을 지키지 못하는 건 죄를 짓는 것이라고 설교를 들었다. 그리고 서약식이 있었다. 다같이 일어나서 손들고 ‘순결’을 서약하는 시간이었다.

아니, 난 이미 섹스경험도 있고 지금도 섹스가 좋은데 앞으로 그럼 섹스를 하지 말란 얘기일까? 순결이 대체 뭐길래? 그럼 성기 결합 없이 오럴 섹스만 하면 그건 순결한건가? 야동보고 자위만 하면 순결한 걸까? 야한 생각이 계속 나고 자위를 하고 싶어도 참는 게 순결한 걸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논의하지 않고 그저 순결순결만을 강요하고 정죄하는 듯 했다.

 옆에 친구들도 있고, 신학교에선 이런 이야기를 더 터부시하기 때문에 친구들에게도 이런 의문점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게 ‘성’과 뭔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 하는 모범생이었고 교회에서도 칭찬받는 일꾼이었고, 그런저런 코르셋 때문에 ‘성’에 대해서는 더욱 말을 꺼내지 못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오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내가 꽉 막혀 있다고 교회와 너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예전의 너로 돌아오라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혼란 속에 신학교에 다녔고, 신학과 남자친구와 만날 때는 더 죄책감이 들어서 섹스를 안 해보려고도 기도도 해보고 성경말씀도 읽어보고 했지만 그래도 섹스는 헤어지는 날까지 계속 되었다. 섹스 없이 살아가도 괜찮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난 왜 일찍 성에 눈을 뜨게 됐을까 스스로를 원망하기도 했다.

초경을 한 초등학교 4학년 이후 엄마는 나에게 피임에 대해서도 알려주셨고,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반 친구들과 함께 성박물관에 가서 남성 성기모양에 콘돔도 씌워봤다. 피임을 잘 한다고 잘 해왔다. 그런데 2012년 9월, 생리예정일에 생리가 늦어지고 가슴도 부풀고 아파서 임신테스트기를 해보니 두줄이었다. 아직 학업중이고 나이도 어리고 남자친구와 만난 지도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신을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산부인과에 갔다. 초음파를 했는데 아주 초기라 아기집이 작게 보였다. 간호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이 지우실 거에요?” 그 말을 듣는데 중학교 보건시간에 받았던 성교육... 자궁 안에서 갈기갈기 찢어지는 태아가 생각나고, 차가운 수술대 위 피흘리는 내 모습이 상상되어 “아니요. 더 고민해보고 올게요.” 하고 병원을 나왔다. 

지금이라면 다른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기로 어려운 결정을 했지만, 가족에게 말하기는 더 어려웠다. 당연히 이렇게 성에 대한 부정적인 환경 속에 가족들은 내 선택을 지지하지 않았고 많이 속상해하고 많이 우셨다. 나는 한 생명을 지키고 낳고 키워낸다는 게 어떤 무게인지 실감을 잘 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엄마가 되는 길을,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생각보다 더 많이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후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당시 나에겐 선택지가 그것뿐이었기에 후회없이 매순간을 살아내려 애쓰고 있다. 

나는 내 삶과 아이의 생명을 분리해서 생각해서 이 결정을 한 것이 아니다. 임신중절을 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행위는 일회적인/단독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후의 수많은 상황들, 관계들에 연결된 일이고 긴 시간에 걸친 삶의 광범위한 변화를 요한다. 따라서 혼전순결/임신중절에 대한 논의는 피임 교육, 성관계에서 여성과 남성의 권력관계, 여성의 성적 실천에 대한 낙인, 육아에 대한 사회적 지원 체계 등 과연 여성으로서 어떤 ‘삶’이 가능한 사회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아이를 ‘낳고 싶다’, ‘낳고 싶지 않다’  ‘안 낳겠다’ ‘못 낳겠다’ 는 욕망 또는 체념 역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고, 국가는 그 욕망의 구성과 실현가능성 모두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낙태죄’는 여성들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도덕과 헌신을 강요하며 그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줄이는 것” 이다. 그것은 피임실천율 높이는 것으로 줄일 수도 있고, 아이 낳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 줄일 수도 있다. 그런데 100% 예방할 순 없다. 100% 완벽한 피임법이 없기 때문이다. 성관계가 우발적으로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심신미약 상태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항상 콘돔을 낄 수 없을 수도 있다. 인간이 살아가며 모든 걸 관리 통제하며 살 수 있겠는가. 안 되는 여러 가지 상황은 있을 수 있고, (정기적으로 성관계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우연히 하게 되어 임신하는 경우) 몸을 완벽히 통제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피임약이 몸에 안 받을 수 있고, 장애가 있거나 루프 시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여자 혼자 아무리 애를 써도 남자가 정관수술 했다고 뻥쳐서 임신한 경우도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은 남성이 여성에게 과실치사를 입힌 것일 수도 있는데, 한 개인에게는 일생일대의 재난같은 굉장히 파급력이 큰 사건인데, 혼자서 다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오히려 이 선택에 대한 비난까지 같이 받아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임신중절을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삶을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임신중절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임신중절이 불법화 되어있어서 그 모든 책임이 여성에게 전가되고 다른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고, 그 속에서 당사자들이 사회적으로 겪는 고통이 유통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보육의 인프라가 엉망이고, 남성중심적인 성문화가 뿌리박혀있고, 여성경제활동율이 낮고, 성별임금격차가 높고, 피임시술교육이 부실하며 완벽한 피임법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원치 않았던 임신의 지속을 중단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범죄자 또는 발각되지 않은 범법자가 되어야 하는 현상 자체가 제도적인 폭력이다.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물어본다. “왜 그렇게 일찍 결혼하셨어요?”   “일찍 결혼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뭐에요?” 라고.

나는 여러 가지 대답들을 하곤 한다. “원래부터 대학다닐 때 결혼하고 싶었어요.” 라고 하면 “세상 물정 모르고 오빠만나 일찍 결혼했네~~”라고 날 어린애 취급한다. “(순결하지 못한) 죄짓지 않으려고 일찍 결혼했어요.” 라고 하면 다 웃으며 공감을 하기도 한다. “애가 생겨서요.” 라고 하면 당황해 한다. 그런데 교회 관련된 사람들에겐 이 대답을 해본 적이 없다. 사실 그들이 듣고 싶었던 대답은 이거였는지도 모르겠다. 교회 내에서도 내 인생과 선택에 대한 경험을 자유롭게 터놓고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원한다. 

믿는페미 페이지 글에서도 적혀있던 것처럼 ‘결혼 여부에 따라 섹스를 다르게 해석하는 작업이 여성들의 삶에 코르셋으로 작용하는 경험’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기혼 여성이 된 것이 만인 앞에 공식적으로 선포되던 결혼식날을 기점으로, 그동안 찝쩍대던 남자들의 애정공세가 확 사라졌다. 하지만 남편이나 아이없이 혼자 다닐 때면 나를 아직도 잠재적 연애대상으로 보고 다가오는 남성들을 만난다. 교회에서 목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은 젊은 나이에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아 키우는 나를 ‘어른’이라고 말씀하신다. ‘결혼’이 대체 뭐길래, 난 이토록 다른 경험을 하는 걸까? 

신학교와 교회 안에서는 신앙의 이름으로 섹스를 규제하고 금기시한다. 그래서인지 페이스북에 ‘크리스쳔 대나무숲’, ‘신학교 대나무숲’에는 성 관련 고민이 참 많이 올라오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사연들을 보면, 여학생들의 사연이 주를 이룬다. 여학생과 남학생 모두 함께 순결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 물론 일부 남학생들은 같은 생각일 수 있겠지만) 교회 내에서도 형제들은 대체로 순결을 지켜야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순결을 잃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쪽은 늘 자매들이다.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성적인 유혹에 넘어지지 말라, 성적인 죄를 짓지말라고 설교하던 유명 강사들은 성범죄를 저질렀다. 기독교에서는 성경적 이유를 근거로 들어가며 ‘혼전순결’이란 이름으로 섹스를 금지하고 있지만, 이쯤되면 사실 그 안에 숨겨진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물론 혼전순결에 대한 선언은 개인의 취향일 수 있겠으나, 이것이 ‘서약’ ‘강요’의 형태로 누군가를 억압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신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성’에 대해 쉬쉬하지 않고 함께 토론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인생의 모양이, 내 주변 여성들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믿는페미를 통해, 그리고 용기내어 이야기하는 내 목소리를 통해 느리지만 조금씩 변해가기를 기대해본다.

*믿는페미 팟캐스트 "교회를 부탁해"에 사연으로 온 글을, 저자의 동의를 얻어 웹진으로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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