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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날것'] 45호 외부 기고
하나님은 낙태한 나를 “잘했다” 칭찬하셨다
여성A
임신이라니
두 줄. 소변이 닿자마자 임신테스트기에 선명한 두 줄이 떴습니다. 처음엔 상황 파악이 안 돼서 한참을 들여다 봤습니다. 두 줄 뜨면 임신이란 걸 모르지 않았지만 혹시나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나 싶어 임신테스트기의 설명서도 다시 봤습니다. 임신이었습니다.
상황 파악이 되자마자 침착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사실 그동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만약 임신을 한다면?’ 답은 ‘중단하자’였습니다. 저는 출산할 계획이 없습니다. 월세 원룸에 사는 1인 가구라 주거도 안정적이지 않고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소득도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제 학업과 일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습니다.
임신중단의 경험이 있는 지인에게 바로 연락했습니다. 임신해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병원을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지인은 수술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닷페이스가 만든 다큐멘터리 <세탁소의 여자들>을 보라고 했습니다. 찾아보니 네덜란드의 산부인과 의사, 레베카 곰퍼츠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레베카 선생님은 웹사이트 ‘위민 온 웹(Women on Web)’을 운영하며 임신중단이 불법인 나라의 여성들에게 임신중단약인 ‘미프진’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위민 온 웹에 접속해 기부금 90유로(한화 약 12만 원)를 지불하고 약을 신청했습니다. 임신을 확인하고 약을 신청하기까지 2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 있었습니다.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고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요. 임신중단의 과정도 순탄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몰랐습니다. ‘낙태죄’를 만들어 놓고 임신을 중단하면 처벌하면서 정작 출산한 여성을 보호하는 안전망은 없는 사회와 내 몸이 싸우게 될 줄은요. “국가는 내 몸에서 손 떼”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이 말만으로는 내 권리들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임신을 중단하며 넘어야 했던 것들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은 병원이었습니다. 임신을 확인한 다음 날 바로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 직원들은 저를 “산모님”이라 부르며 상냥하게 대했습니다. 산모는 아이를 낳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고 나는 산모가 될 계획이 없는데 어쩐지 이상했습니다. 안내하는 대로 개인정보를 작성했습니다. ‘미혼’에 체크하니 바로 직원이 이야기합니다. “저희 수술은 안 해요. 동네 작은 병원 가 보세요.” 세상에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고, 그 중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서 아이를 낳으려는 여성도 있을 텐데 그 여성들이 들었으면 얼마나 속상할 말일까요. 병원 직원들은 한 가지 가족 형태, 1부 1처의 이성애자 커플을 이 병원에 오는 사람들의 고정값이라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질 초음파 검사를 하기 위해 직원을 따라 갔습니다. 제가 하의를 갈아입는 동안 직원은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엄마가 건강해야 돼요” 등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아기 수첩 만들어 드릴까요?” 하시기에 “아니요”라고 했더니 그 후부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의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주 3일 됐네요. 임신 초기에 하는 여러 가지 산모 건강 검사 있는데 안 받으실 거죠?” 하셔서 안 받겠다고 했더니 그 후 아무 안내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알고 싶었습니다. 임신중단의 과정 중 제 몸에 어떤 위험이 있을 것인지, 그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복용해야 할 약 같은 것은 무엇이 있는지, 다른 주의사항은 없는지, 임신중단 이후 몸조리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하는지, 임신중단 약을 먹기 전 하는 건강 검사는 없는지 등을 의사에게 모국어로 지도받고 싶었습니다. 저는 낙태할 거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미혼’란에 체크하고, 아기 수첩을 만들지 않고, 임신 초기 검사를 받지 않겠다고 했더니 의료진은 제게 아무런 조언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받은 것은 뭐가 뭔지도 모르겠는 초음파 사진 두 장뿐이었습니다. 낙태할 거라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혹시나 그들이 저를 신고해 처벌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약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프진’이 무슨 약인지 모르더군요. 저는 약을 배송 받을 날을 기다리며 인터넷에서 복용 후기 수십 개를 읽었습니다. ‘약을 먹고 나면 생리통을 뛰어 넘는 엄청난 복통이 찾아오기 때문에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 놓아야 한다, 핫팩과 구토 억제제, 진통제, 입는 생리대를 준비해라’ 등 많은 조언들이 있었습니다.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었으면 이런 후기를 찾아다닐 일도 없었겠지요.
약 먹기 전날, 먼저 임신중단을 경험한 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준비물을 사기 위해 약국에 갔습니다. 그날 입덧이 너무 심하고 괴로워서 혹시 구토 억제제가 입덧에도 도움이 되냐고 약사에게 물었습니다. 약사는 “안 드시는 게 좋아요. 토할 것 같으시면 하세요. 하셔도 산모님이나 태아 건강에 아무 문제 없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앞으로 겪을 제 몸의 문제들을 정확히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의료진의 정확한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용기 내서 말했습니다. “아, 사실 제가 미프진을 먹을 거거든요. 내일 먹을 건데 오늘은 일을 해야 해요. 일하면서 입덧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요. 하루만 참으면 되는데 너무 힘들어요. 입덧에 도움되는 약 같은 건 없을까요? 진통제도 그냥 생리통·두통약 말고, 미프진 먹고 나서 오는 통증에 도움되는 진통제는 따로 없을까요?” 약사가 제게 물었습니다. “미프진이 뭐예요?” 충격적이었습니다. 용기 내서 말했는데 약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니. 설명드렸지만 약사는 저를 못 믿는 눈치였습니다. 어디서 이상한 약 구해서 아무 거나 먹는 건 아닌가 걱정하셨던 모양입니다. 제 앞에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시더니 그제야 하신 말씀은 “소고기 많이 드세요. 미역국도 드시고요. 출산 후랑 똑같은 몸 상태라고 보시면 돼요. 몸 따뜻하게 하시고 몸조리 잘하세요.” 소고기, 미역국... 이게 지금 제게 도움이 되는 정보인지. 출산 후와 똑같은 몸 상태가 된다고 하니 겁이 났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날 하루 입덧과의 전쟁을 견디는 것뿐이었습니다.
미프진을 먹은 후 들른 병원에서도 의료진의 무지로 인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미프진을 먹고 나면 약 2주간 하혈을 합니다. 또 미프진을 먹은 후 거의 바로 입덧은 멈추는데요, 구토할 것 같은 느낌, 소화 불량, 두통 등은 하혈하는 내내 지속됩니다. 미프진은 WHO에서 복용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놨을 정도로 안전한 약이지만 임신 중단 과정 중 몸에 여러 통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단시간에 호르몬을 억제하는 약이다 보니 몸에 무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혈하며 자궁 속에 있던 임신 산물이 다 배출돼야 임신 중단이 완료됩니다.
하혈한 지 2주가 다 됐을 때쯤, 퇴근길에 배가 너무 아팠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피가 수도꼭지 물 틀어놓은 것처럼 쏟아졌습니다.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불법을 저지른 몸이니까요. 병원 가기 무서워서 일단 집 근처 산부인과에 전화했습니다. 미프진을 먹었다고 사실대로 말하고 지금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냐고 물었습니다. 미프진이 뭐냐고 물으셔서 임신중단약이라고 했습니다. 임신중단이 무슨 말이냐고 물으셔서 “낙태약이에요, 낙태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 병원에 빨리 가 보세요. 죄송하지만 저희 병원은 좀 그래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세 군데에 전화했는데 세 군데 모두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미프진이 뭔지도 모르고, ‘임신중단’이라는 말도 모르고, ‘낙태’라고 해야 알아들었습니다. ‘낙태’는 ‘태아를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임신중단을 선택한 여성을 낙인 찍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임신중단’이나 ‘임신중지’ 같은 대체어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병원은 ‘낙태’라는 말밖에는 몰랐습니다.
2주가 지났는데도 하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남들은 2주면 끝난다던데. 불안해서 집 근처 다른 병원에 전화했습니다. “혹시 프로라이프 의사회 소속 병원이에요?”라고 물었습니다. ‘프로라이프’는 임신중단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모임입니다. 병원은 프로라이프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설명하고, 미프진을 먹고 길게 하혈하고 있는데 진료 가능하시냐고 말했습니다. 의사에게 물어 보고 다시 전화 주겠다며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처벌이 두려워 제 전화번호를 남길 수 없었습니다. 제가 10분 뒤 다시 전화드리겠다고 했습니다. 10분 뒤 전화드리니 일단 몸 아픈 게 우선이니 오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울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질 초음파를 했습니다. 초음파 화면을 보며 의사가 말했습니다. “불완전 유산이에요. 아직 임신 산물이 가득 차 있어요. 수술해서 긁어 내셔야 해요. 저희 병원에서 수술하시긴 어려울 것 같아요. 다른 곳에 가 보세요. 약 먹었단 얘기는 하지 마시고, 임신했는데 갑자기 하혈을 너무 많이 한다고 이야기하세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수술이라니. 남들은 2주면 다 괜찮아진다는데, 수술이라니. 하지만 하혈한 지 3주를 꽉 채우니 하혈은 멎었습니다. 그때 찾은 녹색병원 윤정원 의사 선생님은 다른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미프진 복용 후 하혈 기간은 저마다 다를 수 있어요. 자궁 깨끗합니다. 벌써 다음 달 생리하려고 내막을 만들고 있네요.”
임신중단이 끝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은 것입니다. 아무리 임신중단이 불법이어도 그렇지, 어쩜 의사, 약사, 병원 직원이 하나같이 임신중단에 대한 이해가 없을 수 있을까요. 의아해하다, 최근 읽은 <배틀그라운드>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임신중지는 ‘불법’이기에 산부인과 커리큘럼, 임상 실습, 수련 과정에서도 의료인들에게 교육되지 않는다. 태아가 사망한 케이스나 자연유산, 일부 ‘합법적인’ 임신중절의 케이스밖에 접해 보지 못하다가, 수련을 마치고 임상에 나가서야 인공임신중절의 실태와 최신 지견들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안전하고, 일부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조산사나 자가로도 가능하다고 설명되는 흡입술이나 약물적 임신중절을 의학의 정규 교육에서는 배울 기회가 없다. 자궁 천공이나 유착을 일으킬 수 있어 그 사용을 줄이라고 권고하는 큐렛을 이용한 소파수술이 아직까지 임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이에 대해서도 2005년 표본조사를 마지막으로, 이후로는 진료나 교육 실태가 조사된 바 없다.
인공임신중절이 불법인 상황에서는 여성이 최선의 진료, 가능한 선택지와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침해받는다. 가이드라인이 버젓이 있지만 적용되지 않으며, 기록을 남기지 않아도 되고 수차례 병원을 방문할 필요 없이 단시간에 시행되는 수술적 방법만이 통용되게 된다.
저는 건강보험료를 성실히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신중단 과정 중 제게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어디서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병원이 약 10개나 되는데도 제가 미프진을 먹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의료적 조치는 거부당했습니다. 임신을 확인한 다음 날 방문한 병원에서는 보험 진료를 받아 15,000원을 지불했지만, 미프진을 먹었다고 말한 병원에서는 비보험 진료비 60,000원을 내야 했습니다. 집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녹색병원에 방문해서야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넘어야 했던 두 번째 산은 제 근로 환경입니다. 저는 파트타임 비정규직 근로자이고, 출근하지 않을 때는 외주 업무를 하는 프리랜서이기도 합니다. 아르바이트, 취준, 인턴 등 다양한 근로 형태를 거쳐 지금의 상태로 정착했습니다.
약을 기다렸던 2주, 하혈했던 3주간 쉴 수 없었습니다. 만약 제가 휴가를 며칠만이라도 쓸 수 있었다면 저는 몸조리하며 조금 덜 힘들게 5주를 견딜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 같은 근로 환경에 사람에게 휴가나 병가는 보장되지 않는 권리입니다. 결국 그 모든 통증을 견뎌 가며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든 5주를 보내고 있으니, 취준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여러 회사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용되지 않았습니다. 한 회사 면접 때 “일과 육아 중 어떤 걸 택하시겠어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제 옆에 서 있던 남성 지원자는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글쎄요. 제가 앞으로 결혼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고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을지 안 낳을지도 잘 몰라서요. 그때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떨어졌습니다. 또 어떤 회사에서는 “나이가 있으신데 곧 결혼하실 계획이신가요? 다들 아니라고는 하는데 막상 뽑아 놓고 나면 육아 휴직 쓰는 경우가 많아서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앞선 면접에서 솔직하게 말했다가 탈락을 겪은 저는 “결혼할 계획 없습니다. 남자친구도 없어요. 일이 우선입니다. 뽑아 주셨는데 열심히 해야죠”라고 당차게 말했습니다. 무사히 합격해 다음 단계로 진출했지만 결국 마지막 단계에서 떨어졌습니다. 이유가 알고 싶어 그 회사에 다니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너 되게 잘했다고 들었어. 면접 다녀 온 선배들이 다들 네 칭찬하길래 나도 당연히 너 될 줄 알았거든. 근데 우리 회사 남자 TO가 더 많잖아”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궁금합니다. 제가 면접장에서 겪은 차별과 그로 인해 정규직으로 고용되지 못한 것, 그리고 현재 비정규직 근로자이자 프리랜서로 일하기로 선택한 제 상황, 그 상황에서 임신중단을 겪으며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도 받지 못하는데 쉴 수도 없었던 처지. 이 모든 게 아무 연관이 없을까요. 단순히 제 탓이기만 한 걸까요. 저는 그냥 운이 안 좋아서 하루아침에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걸까요. 차별이 겹겹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어려움을 겪게 된 건 아니었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니 늘 보던 길거리 풍경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사는 곳 반경 3km내에 어린이와 갈 수 있는, 깨끗하고 안전한 놀이터는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찾아보니 집 앞 하천 주변 산책로 말고는 없었습니다. 산책로엔 그네도 없고 시소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집, 유치원, 소아과도 없었습니다. 계단을 걸을 때면 ‘여긴 유모차가 못 다니겠는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경사로도 없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또 아기와 함께 다니는 사람들은 왜 대부분 엄마일까요. 겉모습만 보고 여성이라 추측하는 것이긴 하지만, 한낮에 유모차를 끌고 다른 짐을 이고 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엄마들이었습니다.
이 산들을 넘으며, 24시간 배멀미하는 것 같은 입덧에 시달리며, 저는 사회, 제도, 규범, 관습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낙태죄라 불리는 형법 제269조가 있는 한 제 몸은 그냥 불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불법의 몸으로, 혼전 여성이 몸을 막 굴리면 안 된다는 순결 이데올로기와 싸우고, 양질의 의료적 조치를 받을 수 없었던 제도와 싸우고, 휴가를 낼 수 없었던 파트타임 비정규직·프리랜서 근로 환경과 싸우고, 낙태 불법으로 출산을 강제하면서 출산한 여성을 위한 사회 안전망은 없는 사회와 싸워야 했습니다. 제 작은 몸 하나가 여성에게 가해지는 온갖 차별과 억압의 굴레에 쌓여 있었습니다.
임신중단도 재생산이다
임신중단을 겪고 나니 국가는 여성의 몸에서 손을 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낙태죄를 내버려 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국가는 출산, 임신중단, 자연유산 등을 모두 ‘재생산’으로 보고 인구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낙태죄가 폐지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재생산’이라는 말에 대해 오래 생각했습니다. 국가는 세수 확보를 위해 출산을 장려하고 낙태죄를 존치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다음 세대가 있어야 나라가 유지된다는 애국심과 하나님을 찬양하게 할 후손들을 낳는다는 신앙심으로 낙태죄 폐지에 반대합니다. 이때 ‘재생산’이라는 말은 ‘인류 생산’이라는 의미에 그칩니다.
그러나 ‘재생산’이 저런 좁은 의미로만 해석되도 되는 걸까요. 우리가 후손을 왜 낳아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봅시다. 국가든 기독교인들이든 후대가 있어야 나라의 기틀이 유지된다고 믿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이 사회의 존속입니다. 사회의 존속이 사람의 머릿수를 채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회가 존속되려면, 애국가 가사처럼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을 길이 보전하려면, 사람의 머릿수만 가지고 되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어떻게 존속돼 왔나요. 사람 머릿수를 채우고 그 사람들을 양육하기 위해 여성을 동원했습니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사회 복지 비용을 여성들이 가족 내 무보수 노동으로 대체’해 왔기 때문에 이 사회가 유지돼 온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여성들을 가족 내 무보수 노동으로 동원하기 위해, 사회는 모성을 신성화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와 같은 말을 만들어 모성을 여성이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인 것으로 치켜세웁니다. 즉, 여성은 어머니가 아니면 정상 시민으로 대우받을 수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정희진은 같은 책에서 ‘남성의 성역할은 남성의 모든 정체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남성은 젠더를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성별 제도로 인해 차별받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성역할과 노동자·시민·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은 갈등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이라는 말은 여성은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성은 아버지이면서 노동자일 수 있고, 시민일 수 있고, 국민일 수 있지만 여성은 그럴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되려면 다른 정체성들은 포기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되고 나서 학업과 진로를 포기하고 가족 내 무보수 노동에 동원돼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그랬습니다.
이걸 ‘재생산’, ‘사회 존속’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성도 사회의 구성원인데,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은 희생돼야 합니다. 혼전 섹스는 안 된다는 섹슈얼리티 억압, 결혼 후에는 하던 일과 공부를 그만두고 남편을 내조하고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모성 강요, 원치 않는 임신을 했어도 중단할 수 없고 중단하면 처벌하는 출산 강요 등 수많은 여성들의 희생으로 이 사회가 유지돼 왔습니다.
그러므로, 국가는 제 몸에서 손 떼면 안 됩니다. 국가는 그동안 여성이 가족 내 무보수 노동을 하는 것을 방조하고 조장해 왔습니다. 여성의 몸에서 손 떼지 말고, 그간 여성을 희생시켜 이 사회를 유지해 온 것을 바로잡고 책임져야 합니다. 여성의 몸, 여성이 겪는 차별, 여성을 희생시켜 국가가 얻은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고 제대로 된 인구·출산·여성·가족 정책을 내놔야 합니다. 그러려면 낙태죄 폐지, 차별금지법 도입, 생활동반자법 도입 등이 반드시 실현돼야 할 것입니다.
저는 임신을 중단했지만, 제가 재생산을 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사람 머릿수 채운다는 협소한 의미의 ‘재생산’으로 유지되고 존속된 건 ‘가부장제’뿐입니다. 진정으로 사회를 존속케 하는 재생산이 실현되려면 여성처럼 생애 전체를 희생하는 집단이 없어야 합니다. 여성은 출산 후 자기 삶을 존속하지 못하는데 어째서 사회 존속을 위해 여성을 희생시키나요. 이렇듯 차별을 물려주고 가부장제를 물려주면서 그걸 ‘재생산’, ‘사회 존속’이라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저는 더 이상의 차별을 물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여성의 생애 전체를 희생시켜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재생산’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순결 이데올로기로 여성을 억압하지 않는 사회,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하고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회, 튼튼한 사회 안전망이 있어 출산 후에도 육아와 경력 유지에 장애물이 없는 사회, 그런 사회를 물려줄 것입니다. 제게는 이게 재생산이고 사회 존속입니다.
하나님은 낙태한 당신을 “잘했다” 칭찬하십니다
미프진은 임신 12주 이내일 때 먹으면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약입니다. 미페프리스톤 한 알과 미소프리스톨 네 알로 이뤄져 있습니다. 미페프리스톤은 임신 호르몬을 억제하는 약이고 미소프리스톨은 자궁을 수축시키는 약입니다. 미페프리스톤 한 알을 먼저 먹고 난 후, 48시간 이내에 미소프리스톨 네 알을 먹으면 끝입니다. 그냥 흰 색 알약들입니다. 미페프리스톤은 물과 함께 삼켜도 되지만 미소프리스톨은 녹여 먹어야 합니다. 미소프리스톨을 녹여 먹는 과정에서 구토 증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크게 쓰진 않지만 아무래도 알약을 녹여 먹다 보니 헛구역질 같은 게 나기도 합니다.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으면 물과 함께 삼키거나 질내 삽입해도 됩니다(임신 7주 이내일 때만 가능합니다. 7주 이상이면 무조건 녹여 먹어야 합니다.). 이 경우 체내에 약의 흔적이 남기 때문에 혹시 위급 상황이 생겨 응급실에 실려 갔을 경우 형사 처벌의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민 온 웹 의료진은 제가 약을 복용하기 전 이메일로 “당신의 나라는 낙태가 불법이니 절대 경구 투여(삼키는 것)하거나 질내 삽입하지 마시고 설하 복용(녹여 먹는 것)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지도했습니다.
미소프리스톨을 녹여 먹고 10분쯤 지나고 나면 복부에 강한 통증이 오면서 하혈이 시작됩니다. 위민 온 웹 의료진은 이 통증이 매우 크니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약 복용 전 읽은 수많은 후기에서도 진통제가 소용이 없었을 정도로 배가 아팠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무서웠습니다. 미소프리스톨을 먹으면 다 끝인데, 용기가 안 났습니다. 배가 얼마나 아플지, 혹시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닐지, 온갖 걱정이 들었습니다.
미소프리스톨 네 알을 손에 쥐고 엎드렸습니다. 저도 모르게 되뇌었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저 혼자만 사는 저의 집에서 약을 꽉 쥔 채 식탁에 엎드려 30분을 울며 기도했습니다. 불법의 몸으로 이 무거운 짐들을 혼자서만 져야 하는 상황에서, 어마어마한 통증이 찾아올까 두렵고 혹시 임신중단에 실패하는 건 아닌지 두려운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용기 내 약을 먹었고 태어나 느껴 본 적 없는 복통을 경험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이렇게 배가 아픈데 혹시 내 몸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습니다. 제 사정을 아는 교회 목사님께 전화드렸습니다. 지금 몸이 좀 아픈데, 기도를 해 주실 수 있으시냐고 물었습니다. 40분 정도 목사님의 기도를 전화기 너머로 들으며 아픈 배를 움켜쥐고 울었습니다. 전화를 끊고는 울다 지쳐 잠 들었습니다. 자다 깨다하기를 14시간째, 드디어 복통과 입덧이 멈추고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3주 하혈 후 임신 중단은 완료됐습니다. 과연 미프진은 안전한 약이었습니다. 약을 얻고 복용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복용 후 누워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잠을 자도 될 정도로 안전한 약입니다.
임신을 중단한 덕분에, 제 배우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파트너와 성급한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제 일과 학업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건강도 되찾았습니다. 결혼과 출산을 제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의 차별적 사회에서 가부장제 유지의 기능만 수행하는 강요적인 재생산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법을 어겼지만 법을 어김으로 인해 제 인생의 수많은 것들을 얻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저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됐습니다. 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저와 제 자매들의 권리를 위해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기도는 법도, 제도도, 국가도 아무도 저를 보호하지 않고 임신을 중단하는 저를 비존재로 여길 때 드린 절규와 같은 기도였습니다. 그런 저는 주님 앞에서 불법의 몸 그대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해 임신을 중단하길 원하는 자매 여러분,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당신의 삶을 지키세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여성을 희생시키는 재생산에 동원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하고 자신의 삶을 지키며 나의 권리와 자매의 권리를 주장하는 당신을 되레 칭찬하십니다. 배우자와 기도로 준비하며 이룬 출산이 축복이듯, 나 자신을 지킨 임신중단도 주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교회X낙태죄 : 배틀그라운드 저자와 함께하는 북토크>
- 일시 : 2019년 2월 9일(토) 오후 2시-5시
- 장소 : 섬돌향린교회(서울특별시 마포구 성미산로10길 26)
• 다큐멘터리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 간추려 보기
• 저자 북토크
- 나 영 : "생육하고 번성하라" 축복인가 명령인가
- 박종주 : 낙태죄가 만들어내는 몸들
• 질의응답 : 나영, 박종주 + 달밤, 자캐오신부
- 참가비 :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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