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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날것'] 43호
곁눈질 한 죽음.
-폴짝
살아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 둘은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생(生)에 속한 사람들은 그 옆의 사(死)를 보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도 여전히 ‘나’의 죽음은 실감 나지 않는 것이지만, 종종 곁눈질로 죽음을 훔쳐볼 때가 있다. 이 글은 그 이야기들의 나열이다.
# 교복
중학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 다음 학년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는 겨울방학에 같은 반 친구가 한 명 죽었다. 가족들끼리 겨울 나들이를 다녀오다가 사고가 났는데 이 친구만 죽었다고 했다. 그때 처음으로 학생이 죽으면 장례 과정에서 그 학생이 다녔던 학교와 교실을 한 바퀴 돈다는 것을 알았다. 워낙 조용한 친구였고, 겨울방학이어서 반 임원이었던 친구와 나를 포함한 몇 명만 그 자리에 함께했다.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데 누군가는 흐느껴 울었고, 누군가는 울음을 애써 참으려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나는 미처/차마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과정이 끝나고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방학 때 입는 교복만큼이나 어색했다. 그 후 학년이 바뀌었고, 그 친구는 잊혀졌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며칠 동안 그 친구의 이름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지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그 친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혀갈 때쯤 학교 문구점에서 그 친구 어머니를 만났다. 무언가를 고르고 계산을 하려는 그 친구 어머니에게 문구점 주인은 포인트 적립을 할 거냐고 물으면서 전화번호 뒷자리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분이 번호를 불렀을 때 문구점 주인은 죽은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000으로 적립하면 되냐고 물으면서. 그 친구의 어머니는 “아, 걔는 어디 멀리 갔어요. 공부하러.”라고 대답했고, 뒤이어 그 포인트를 동생에게로 옮긴 후 문구점 문을 나섰다.
문방구에서 죽은 친구의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내가 처음 겪었던 누군가의 죽음이 ‘어디 멀리 공부하러 간 것’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친구가 모은 포인트를 그 동생의 계정으로 옮기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나는 죽음이 똑 떨어지는 분리, 깔끔한 단절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이 일상의 공간에 닿아 있다는 것을, 죽음 이후에도 계속 죽은 이의 삶이 살아질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 거실
‘가는데 순서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내 주변에서 가장 자신의 죽음을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우리 외할머니이다. 어제 아침에도 할머니는 100살까지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내 장난에 “내가 얼렁 죽어야 니들이 편하지”라고 운을 띄우고는 자식 중 눈치 안 주는 사람이 없다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기-승-전-서운함으로 이어지는 할머니의 ‘얼른 죽어야지’라는 자조 섞인 이야기는 ‘그래도 오래오래 사셔야 한다’는 자식들과 손녀의 부탁으로 끝이 난다. 내가 관계 맺는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래서 가장 생생하게 죽음과 마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할머니에게 죽음은 자신의 존재와 필요를 확인하는 도구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죽음과 가까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자조이자, 가장 확실한 존재의 확인법이 되는...
‘얼른 죽어야지’가 입버릇인 할머니와 가장 친한 할머니의 막내아들, 나의 막내삼촌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늘 아침마다 약을 먹었다. 그래서 삼촌이 출근하고 지나간 자리에는 늘 흰색 약봉지가 남아있었다. 건강해 보이는 삼촌이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는 것은 이상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그 약이 떨어지지 않도록 온 가족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에서 그 약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얼마 전에 삼촌이 약을 줄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에게 그 약의 정체를 물어보니 공황장애약이라고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에서 일자리를 찾으려니 지방의 고졸 출신인 삼촌에게 마땅한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돈은 벌어야 해서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친구 따라 영업직이 되었는데 그때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고 했다. 지하철에서 숨을 못 쉴 것 같은 공포에 몇 번 기절하고 병원에서 눈을 뜨고 난 후에 삼촌과 가족들은 스트레스와 심리적인 변화를 인정할 수 있었고,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고 한다.
죽음과 가까워지는 할머니와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매일 약과 함께 삼키는 삼촌. 세상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는 이 두 사람이 오랜만에 우리 집 거실에서 자고 있다. 이 둘에게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죽음도 당연한 감각일까.
# 10원
아직 이십 대 초반이던 시절. 친하게 지내던 학교 선배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던 때 아빠의 나이와 학교 선배의 나이가 같았다. 핼쑥한 얼굴을 하고는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선배의 얼굴에서 나는 본 적도 없는 젊은 시절의 아빠를 떠올렸다. 아빠는 어린 나이에 할머니를 잃고 그 충격 때문에 무작정 절에 들어가서 생활했다고 했다. 엄마가 없으니 자신이 버스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10원짜리 같았다고, 그래서 그 시절이 괴로왔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본 아빠의 첫 눈물은 할머니의 추도식이었다. 음식을 앞에 두고 엉엉 울며 고개를 들지 못하던 아빠의 눈물이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 눈물이다. 그 말들이 떠올라서였을까 나는 선배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시간 내내 빈소를 지켰다. 선배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만난 적 없는 내 또래의 아빠, 스스로가 10원짜리보다 못하다고 느끼던 아빠를 다독이는 마음으로.
# 발목
죽음을 생각하니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내 발목이었다. 지난여름 믿는페미 스티커 배송 관련 통화를 하면서 계단을 내려가다가 마지막 계단을 보지 못하고 넘어졌다. 저 위에서 떼굴떼굴 구른 것도 아니고 한 계단을 건너뛰었을 뿐이었는데 한의원과 정형외과를 전전긍긍했다. 그러다가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아주 비싼 검사를 하나 하고 나서 “잘 보이지 않는 뼈 사이에 염증이 아주 심각하군요.”라는 의사의 판결과 함께 반깁스를 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생애 처음 반깁스를 하고 2달이 넘는 시간을 보냈으니 내 발목이 아프기 전과 같아질 줄 알았다. 염증도 사라졌겠다 박혜경의 ‘외로운 날들이여 안녕!’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발목이 아팠던 날들, 그래서 더디고 괴로웠던 날들과는 안녕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날씨가 추워지니 발목이 다시 아프다. 이제 누군가 쪼그려 앉은 것만 봐도 ‘흐아 저 자세 발목이 아픈 자센데. 나는 이제 저렇게 못 하겠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되었다. 그뿐 아니다. 프로 환승러인 나에게 스피드는 생명이다. 특히 아침에 학교 갈 때 후다닥 뛰어서 계단을 내려가는 맛이란. 그런데 발목이 다친 이후에는 발목이 아프지 않아도 계단을 뛰어 내려갈 수 없게 되었다. 계단을 내려가려고 계단 끝에 서면 내가 넘어지던 순간이 계속 반복되면서 속이 울렁거리고, 시야가 흔들린다.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평생 내 발목은 지난여름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주기적인 통증과 뻐근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서.
내 발목처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덮어두고 싶은, 그렇게 함으로써 잠시나마 안도하고 싶은 순간이 나에게도, 우리 사회에도 있다. 한 번쯤 뉴스에서 혹은 스쳐 지나가면서 들어봤을 이야기다. 2009년의 용산, 2014년의 진도와 신촌, 2015년의 강남역 10번 출구, 광화문 광장의 농민, 2017년 다시 굴뚝으로 올라간 노동자들, 쫓겨난 식당 주인, 2018년의 용기를 낸 여성들의 이름, 인천의 광장, 한 정치인의 이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던 철거민의 이름, 김용균 노동자의 이름들이 그렇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고,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괜찮지 않은 것들이었다. 사람들이 죽었고, 죽음으로서 지워졌고, 혹은 지움으로써 죽이고자 했다. 이들을 기억하자고 하기에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발목이 아플 때마다 그들을 떠올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리고 멈추고 싶지 않다. 수영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내 팔에 있는 노란 팔찌를 보고 ‘아, 폴짝이구나.’라고 확신했다고 했다. 나는 더 격렬하게 기억함으로써 나도, 사회도 다른 확신들을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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