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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날것'] 39호
살아지는 삶, 살아있는 삶, 살아가는 삶 

-쏘네치카


나는 죽고 싶었다. 내가 겪는 모든 어려움의 책임을 나 자신에게 물은 결과였다. 내 인생은 내거니까, 모두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볼 때 갖는 감상의 출처가 되는 미의 기준부터 땀샘의 활발한 정도,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으며 살 것인가 정하는 모든 상황에 제약이 있다. 내 인생이 내 것이어도 자기가 더 잘 아는 양 구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거울 속 나를 보는 미의 기준은 사람들이 내게 던지는 칭찬과 나쁜 말들이 뒤섞여 정해졌다. 나는 서비스직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내 외모에 대해 한마디씩 던질 수 있다. 그거 무슨 파마냐는 질문은 내 머리가 예쁘다는 뜻일 거다. 피곤한가보다는 말은 그날 내가 전체적으로 구리다는 뜻이다. 기운 내고 정신을 차리려고 커피를 마시는데 손이 달달 떨리고 손바닥에서는 땀이 난다. 비싼 옷은 살 수 없다. 그래도 품질이 좋은 옷을 입고 싶다. 세일중인 옷들을 뒤져 고른 것을 내 취향이라 이름 붙인다. 커피도 마시고 옷도 샀으니 식사를 할 돈이 없다. 편의점에서 기프티콘으로 간식을 사 먹자. 모두 너무 비싸다. 그냥 먹지 말자. 날씬한 것은 즐겁다.


 지쳤다. 내 삶이 어떻다고 징징대는 것이 지겹다. 내 상황이 어떠해서 지금 어렵다는 말은 “너만 힘든 줄 아냐”는 말로 돌아오기 쉽다. 안다. 나만 힘들지 않다. 이걸 중요하게 여길 때의 나는 고장 난다. 다들 어려움을 지나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 어려움을 끊임없이 겪으며 용서와 사랑을 반복한다. 그런데 나는 미움과 분노에 묶여 내 몸을 칼로 긋고 있다. 이 정도로 안 죽는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나는 비겁하다. 충분히 힘들지 않다. 그런 주제에 그따위로 살며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나는 고장 났다. 고장 나서 고칠 수 없다면 버려야한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습관처럼 들다가 죽자는 다짐이 한 번 들면 내 모든 사고는 그 방향을 향한다. 버스 기사가 막 달려온 내가 타려던 찰나에 승차 문을 닫아버려서, 집이 너무 더러운데 치울 자신이 없어서, 직장에 자꾸만 지각해서, 몸살이 좀처럼 낫지 않아서 나는 자살해야 한다. 버스 기사는 하찮은 인간을 무시하는 현명한 사람이고, 집이 더럽다는 것은 내가 집도 삶도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고, 몸살이 낫지 않는 것은 내가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인데 부득 부득 살아있어서이다. 당장 겪는 모든 일을 죽어야 할 이유로 연결하는 때의 나는 삶을 사랑하고 있다. 사랑하는 만큼 두렵다. 이 어려움이 끝나지 않을까 봐. 해결되는 줄 알았던 순간들은 모두 반짝 착각일 뿐이고, 결국엔 같은 문제를 반복할까 봐. 그렇게 끊임없이 여러 손해를 끼칠까 봐. 내가 살아있는 것이 오직 내 엄살만을 고려한 이기적인 선택일까 봐 두렵다.


 두렵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편도 아비도 없이, 다른 가족 한 명 없이 살아가는 것은 정말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7년째 치료 중인 정신병은 영원히 낫지 못하고 회복되다 주저앉기를 반복할 것이다. 내 집은 내가 한 달을 일 년을 더 살아도 계속 더러울 거다. 내가 나에 대해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하고, 그걸 글로 쓰고, 말로 전해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아무도 나를 모른다. ]


 소네치카는 가족에게 절연을 통보 당한 이후 1년 이상 고시원에서 살았다. 어느 날은 자살을 위한 물건 하나를 옆에 두고 펑펑 울며 노트북에 일기를 썼다. 고시원에서의 여름은 너무 더웠다. 복도에는 CCTV가 있고, 내 작은 방에는 모든 공간에 쓰레기와 잡동사니들이 뒤섞여 겹겹이 쌓여있는데 복도가 더 시원했다. 평수가 작고 창문은 더 작은 공간에 들어온 더위는 구석구석 짱박혔다. 죽으면 더위도 느껴지지 않을 테지, 그래도 자살은 쉽지 않다. 마음을 정리하며 눈물로 일기를 쓰고 아무튼 죽지 말자고 다짐했다. 곧바로 자살 예방 센터에 갔다. 전에도 갔던 적 있다. 우울이 심해지면 교회도 안 가고, 동아리도 안 가고, 알바도 그만두고, 병원도 안 간다. 우울할 때 상담을 하러 갈 리 없다. 집 밖은 물론 방 밖으로도 나가기 어려웠다. 연락도 여러 차례 무시했으니 상담 지원이 일찍 끝났다. 새로운 상담사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다 물었다. “그때 연락이 두절돼서 상담을 못 했었잖아요, 이번에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나는 그때와 지금의 다른 점을 말했다.


 “그땐 의지할 가족들이 있었어요. 일을 안 해도 먹고 씻고 잘 수는 있었어요. 우울해지면 단계별로 다 그만두다가 상담도 그만뒀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 인생이 몽땅 제 책임이에요. 아무것도 그만둘 수 없어요. 알바를 안가면 고시원 월세를 못 내고, 고시원 월세를 못 내면 저는 어디로 갈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우울하다는 이유로 그 무엇도 그만둘 수 없기 때문에 연락이 두절될 일이 없을 거라는 거였다. 말하다 보니 그때의 상황을 한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상담사가 말했다.


 “저희 센터에서 해줄 수 있는 지원이 있고, 해줄 수 없는 지원이 있는데 쏘냐는 해줄 수 없는 것까지 바라는 것 같아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으면 반응을 빨리 결정하기 어렵다. 일단 말이 머릿속에 박힌다. 뒤돌아서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생각한다. 작년 여름의 일이 그렇게 올해 겨울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다.


 “잠수탈 걱정하시길래 잠수 탈 일 없다는 걸 설명한 거에요.”


내 해명에 상담사는 어떠한 답변도 하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같은 말도 하지 않았다. 사과도 물론 하지 않았다. 상담 지원과 의료비 지원 등 가능한지 검토해보고 연락 준다 말했는데, 아무 연락도 주지 않았다. 가정폭력으로 친부를 고소, 임시 보호 숙소에 사흘간 있다가 고시원에서 살기 시작, 경제적 주도권을 가진 삼촌이 내 생일에 절연을 통보, 불안해서 되는대로 늘린 세 개의 아르바이트,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던 수준의 우울 장애. 난 그냥 이런 힘든 일을 겪었다고 말 할 뿐인데 당신은 도와줄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17살 때 대학병원 소아정신과에 갔다. 잠을 어떻게 자느냐고 정신과 교수가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매일 매일 달라요.” 주치의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도 대충 어느 정도가 있을 거 아냐, 그게 몇 시부터 몇 시쯤이야?” 나는 더 똑바로 말했다.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는 날도 있고, 저녁 다섯 시에 일어나는 날도 있어요.”




 사람들은 내게 가볍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똑바로 대답한다. 내 대답은 이해받지 못한다. “아니,” 라는 말과 함께 한 번 더 같은 질문을 듣는다. 그럼 더 똑바로 대답한다. 그제야 이해하거나 영원히 이해하지 못한다. 나를 제 고집뿐인 사람으로 여긴다. 애초에 내가 대화할 의지가 없는 거라고 판단한다. 아무도, 내게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는 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판단은 이미 끝났으니 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가 느끼는 이 불편함, 부당한 상황이 내 문제일까 무서웠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워했다. 

지금은 내가 문제이거나 세상이 문제이거나 아무튼 둘 다 고칠 수 없어서 상관이 없는 일 일까봐 무섭다.


[ 시간이 계속 흐른다는 것 ]


 나는 아직도 청소년기에 갇혀있다. 내 청소년기의 상황을 해결하지 못할 것으로 못 박아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의 마음과 내 문제만 해결하려 했다.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기도하지 마라, 가정폭력 보호 기관을 찾아봐 줘라.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어려서 그래, 지나고 나면 기억도 안 난다.”고 말하지 마라, 청소년 우울증의 위험성과 주변 사람들의 대처법을 찾아보고 날 그렇게 대해줘라. 경찰서에 한 번만 대신 전화해줘라. 애비가 자길 무시하냐며 줘 패서 신고했더니 왜 고소 진행 안 해 주냐 따져줘라. 애는 처벌 의사를 확실히 밝혔다는데 왜 들은 척만 하느냐 따져줘라. 외부의 적을 가리키고 내 편을 들어줘라. 자해를 왜 하냐고 내 손등을 때리지 마라,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내 방에 쳐들어와 커터칼을 몽땅 부러뜨려버리고 날 위해 옷을 찢으며 내 앞에서 울어줘라. 그리고 날 안아줘라. 피가 나 딱쟁이가 생긴 자해 상처보다 내 마음이 더 아프다는 걸 알아줘라. 제발 알아줘라.


[ 기억에 선명하다. 추억이 아니라 트라우마다. ]


 지나고 나면 기억도 안 나거나 추억일 거라는 말이 너무 싫어서 나는 기를 쓰고 그 순간에 남았다. 나아가자고 한 발짝 움직여도 다시 그곳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상황이 나아졌다. 내가 뭔가 해결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정말 많은 여성 기관과 도움의 창구가 있었다. 친구가 십만 원을 빌려줘서 상해진단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진단서를 제출하니 가해자에게 주거 퇴거 조치가 시행되었다. 난 계속 고시원에 살았다. 이를 무시하고 그 집에 있는 가해자에게 ‘왜 계속 거기 있냐 마주치면 경찰 부르겠다.’ 말했더니 삼촌에게 연락이 왔다. “왜 갈 데도 없는 아빠를 자꾸 내쫓으려 하냐.” 난 그 사람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하니 답장이 왔다.





 당시 연락하던 친구는 이 상황을 계속 말하는 내게 ‘삼촌이 너 집에 들어오라고 그러는가보다. 난 예상했어.’ 같은 말을 했다. 상황 파악을 한 이후에는 내게 진정하라며 보라색 그림을 한 장 보냈다. 얘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상황은 뭐야. 이번엔 잘 해결하고 있었다. 내 마음뿐 아니고 상황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근데 또 잘못됐다. 내가 문제인가 봐.


[ 충분히 아프지 않은 것 ] 


 이미 몇 번의 자살 시도를 했던 바 있는 열여덟의 내게 애비는 “왜 이렇게 살이 쪘냐, 헬스장 좀 다녀라.” 그렇게 말했다. 칩거 생활 중이던 우울증 환자가 섭식장애에 걸리기는 참 쉬웠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충분히 괴롭지는 못하다. 끝내 자살하지 못하고 지금 살아있는 것도 그 이유다. 내 이야기를 섭식장애 치료 모임에서 언급한다면 다들 코웃음을 칠 것이다. 나는 어쨌든 매일 뭔가 먹었다. 토할 때도 싹싹 다 토하진 못했다. 구토는 힘들고 어려웠다. 안그래도 두통이 잦은데 구토를 한바탕하면 머리로 피가 쫙 몰렸다. 머리가 와와거리는 느낌이었다. 허공을 응시하며 큰 피자 한 판을 혼자 급하게 먹었다. 배가 아파서 두조각을 남겼다. 곧장 화장실에 가서 토했다. 다시 빈 공간이 생겼으니 두 조각을 천천히 먹었다. 나는 아팠다.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구토가 일상이 될 만큼은 아팠다. 작년까지 나는 일상적으로 구토를 했다. 담배를 피우다가, 양치하다가, 기침하다가 위액이라도 토했다. 게임에 중독되면 살이 빠진다기에 종일 빵 한 개만 먹고 온라인 게임에 몰두한 날이 있었다. 마른 몸을 위해서라면 내 시간을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동네 산책을 한 시간 이상하고, 집에 돌아와 근력 운동 영상을 따라 했다. 샤워하고 스트레칭 영상을 따라 했다. “넌 충분히 말랐어. 지금 발로 차면 부러질 것 같아.”라는 말로 내 노력의 결과를 인정해주는 대신 내 괴로움에 대해 물었다면 어땠을까. 토할 때 기분은 어떻냐고, 너를 살아가게 하는 네 살이 왜 그렇게 싫으냐고, 왜 죽고 싶으냐고 물어봐 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울면서 읽은 그 많은 정신과 서적들의 친절하고 유능한 주인공처럼 누군가 내게 모든 어려움의 본질을 찾아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사람들을 바꿀 수도 나를 도와줄 수도 없지만, 그 시간을 지난 잔뜩 망가진 나는 여기에 있다. 다들 내 마음만 살폈고, 내 상황은 아무도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원망 속에서 나는 마음을 내팽개치고 싶었다. 말을 똑바로 하고 대처를 똑바로 해야지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내 애비는 날 때린 다음 날마다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비쳤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또 나를 때렸다. 미안한 마음은 쓸데없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나는, 그냥 죽어버려야 한다. 아무리 반성해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실수를 고칠 수 없을 것이다. 


[ 살아져 지금까지 온 오늘 ] 


 2년간 6kg이 쪘다. 그래도 정상 체중이다. 그러나 더는 마르지 않았다. 홀쭉하던 얼굴이 통통해졌다. 우울한 몸에 식사량을 줄이자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집안일을 새벽 세 시까지 하고 다섯 시까지 유튜브를 봤다. 잠이 오길래 알람을 스무개 가량 맞춰두고 잤다. 일어나지 못했다. 잠깐 눈을 떴다가도 잠이 오면 계속 잤다. 오후 느지막이 연락했다. 너무 늦게 자서 너무 늦게 일어났다고 말했다.


 내가 우울증이라고, 가족이 없다고 누군가 이런 일을 이해해줄 수는 없다. 정신병 진단을 받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어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와중에 실수를 대처하고 발전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나만 힘든 양 나는 봐달라 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저지른 일은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식사를 하기가 더 어려웠다. 남에게 이만큼 피해를 끼치고 통통한 나는(사실 정상 체중이지만) 염치가 없는 것 같았다. 피해를 그렇게 끼치고 밥이 넘어가? 죽고 싶다면서 밥을 먹어? 뭐 하는 짓이야? 배고픔을 느껴? 그렇다고 밥을 먹어? 뭐 하는 인간이야?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종일 굶다가 집에 와서 정신과 저녁 약 서너 알을 삼키면 그제야 긴장이 풀려서 뭔가 먹었다. 와중에 내 실수로 인한 피해를 온몸으로 느꼈을 직장 선임에게 사과를 못 했다. 너무 무서워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사과를 하자마자 그 사과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을까 봐, 그럼 난 미움받아 마땅한 사람이라 반박도 못할 테니 무서웠다. 입도 때지지 않았다. 소용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지도 모르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너무 무겁다. 이해받지 못할 것을 염두에 둔 채로 어떻게 한마디라도 꺼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울하다고 늦게 자고 출근하지 않은 것에 이어서 미움을 직통으로 받을까 봐 무섭다고 사과도 안 할 수는 없었다. 편지를 썼다. 편지를 읽은 선임은 내게 어떤 점에 화가 났는지 말해주었다. 나는 잘하겠다고는 말했으나 죄송하다는 말은 못 했다. 이런 나를 나도 더는 이해할 수 없어 생각하기를 멈췄다. 식욕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새벽부터 아침, 점심 퇴근 시간까지 17시간 즈음 굶어도 꼬르륵 소리 한 번 안 났다. 이런 증상이 반가웠다. 드디어 제대로 힘들어한다. 진즉 겪었어야 할 일을 겪는다.



[ 살아가는 소네치카 ]


 김연수 작가의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의 주인공 카밀라는 애인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넌 너를 너무 사랑해.” 그러니까 글을 쓰라는 말이었다. 이 책 재미있으니 다들 읽어보시길.


 카밀라의 이름은 그냥 카밀라라서 카밀라라고 했다. 소네치카도 그냥 소네치카라서 소네치카다. 소네치카 역시 스스로를 너무 사랑한다. 그리고 글을 쓴다. 가끔 느린 속도로나마 책을 읽었다. 블로그에 글을 적었다. 활동하는 동아리에서 소규모 잡지를 만들어 배포했고, 내 소설을 실었다. 정신과 의사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곪은 부분을 긁어냈다. 내가 나를 죽일까 봐 겁이 나서 정신과 폐쇄 병동에 자의로 한 번 더 입원했다. 거기가 얼마나 심심한지 잘 알고 있으니 책만 한 스무 권을 챙겼던 것 같다. 옆 침대의 젊은 할머니를 언니라고 부르며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컬러링북의 벚꽃나무 그림에 벚꽃잎을 몽땅 같은 색으로 칠했다. 나노 블록을 조립했다. 내가 나노 블록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남들은 “그거 10개만 해보면 질린다.”고 말했었는데, 이미 스무 개에서 서른 개 가량 맞춘 이후였다. 유행이 지난 지금도 가끔 나노 블록을 사서 조립한다. 하도 많이 조립했으니 부서져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 때가 타면 버린다. 비슷한 걸 사서 다시 조립한다. 정말 다양한 팟캐스트를 들었다. ‘대충 살자’는 문구와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문구가 은박 금박으로 쓰인 스티커가 너무 예뻐서 한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소소 시장에 다녀왔다. 우연히 김사월의 수잔이란 노래를 듣고 온라인 닉네임을 몽땅 수잔으로 했다. 게임 닉네임도 마찬가지였다. 소소 시장 현장에 김사월이 공연을 왔던 적도 있다. 도착해서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김사월을 봤다. 굿즈 2015 행사에 다녀왔다. 믿는페미 책모임 링크가 떴기에 신청하고 다녀왔다. 퀴어문화축제에 처음으로 다녀왔다. 책모임 사람들도 함께 만나 걸었다. 공연인 줄 알고 비치 프라이드를 예매했다가 클럽이라 당황했다. 아는 얼굴들을 만나 같이 술을 마셨다. 새벽에 다 같이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동네 청년들을 위한 공간에 글쓰기 모임이 시작되어 참여했다. 내가 쓴 글을 나누고 사람들이 나누는 글을 음미했다. 여성은 화장하라는 억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다 지쳐 술자리를 뛰쳐나왔다. 더는 이 사람들을 안보겠다고 다짐했다. 소란의 공연을 봤다. 입덕을 하고 스케줄을 되는대로 챙겼다. 다른 팬들 무리에 껴서 퇴근길을 기다리고 함께 셀카를 찍었다. 저번에 어느 공연장에서 봤던 얼굴이라며 나를 아는척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하도 많이 봐서 익숙한 얼굴들이 소란의 공연을 보러 갈 때마다 보인다. 신승은의 라디오를 듣고, 김제형의 공연을 보러 갔다. 신승은이 게스트였다. 내게 아는 척을 해주는 당신에게 봉투에 담긴 엽서를 한 장 선물했다. 하헌진의 공연을 봤다. 그날 구입한 앨범에 사인을 받았다. 


 정말 많은 시간을 지났다. 즐거운 일을 많이 만났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으며 반가운 사람도 많이 생겼다. 쏘냐의 삶은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여러 사람을 떨쳐냈다. “제가 아니면 누가 언니 말 들어주겠어요.”라고 말한 동생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거의 십년을 곁에 있어 준 친구의 연락처를 지웠다. 나를 모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가난하게 살겠다는데 기어코 돈을 더 빌려주겠다는 다른 친구에게는 화를 내고 차단했다.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삼촌에게 하고 싶은 말 다 하다가 차단도 당하고 경제적 지원도 끊겼다.





[ 사 람 들 ]


 거르고 그러다 보니 이젠 아무도 없다. 아프지만 절망적이지 않다. 정말로 아무도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예비 친구들이 지천으로 널렸다. 어쩌면 이미 친구인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어제보다 더 좋은 사람이다. 정신과 약 처방을 새로 받은 이후로는 책이나 장문의 기사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9월부터 새로 다니는 정신과의 의사가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다고 했다. 자기가 답을 알려줄 테니 병이 나을 거라고 내게 희망을 줬다. 그 희망의 시스템을 내 안에 입력하기 위해 내가 지나온 길, 그 길에서 내가 만난 즐거움을 자주 되새긴다. 즐거운 생각을 끌어안고 아픈 시간을 잘 씹어 삼킨 나는 잘살아갈 수 있다.


 어쨌든 똑바로 사과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선임이 날 싫어하는 것 같다는 두려움으로 나는 한동안 바짝 얼은 채 근무했다. 어색하고 긴장된 내 모습을 보고 선임이 퇴근길에 말을 걸어주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나쁜 감정 없다고. 다만 이미 깨진 신뢰가 회복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덧붙였다. 그날은 퇴근 버스에서 바로 허기가 느껴졌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식사가 넘어갔다. 죄책감이 해결된 것이다. 똑바로 말해준 선임에게 고마웠다. 이제는 굳이 환절기가 아니어도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 많다. 우리는 서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상화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똑바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똑바로 말할 수는 있다.


 그저 살아진 소네치카는 앞으로 잘 살아갈 것이다. 어려움을 또 만나도 잘 이겨낼 것이다. 해명을 반복할 필요 없이 마음의 힘듦을 곧바로 이해해주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오래 볼 것이다. 정신과 의사의 건강 관련 조언도 잘 따르고, 돈 관리도 집안일도 잘할 것이다. 죽음은 언젠가 찾아오겠으나 결코 자살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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