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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날것'] 37호 

‘인싸’ 되는 믿는페미 하기

- 새말



  이번 날것 주제로 ‘인싸’를 잡기 무섭게, 온갖 광고에서 ‘인싸 되는 ㅇㅇㅇ하기’가 우후죽순으로 보인다. ‘인싸들이 가는 카페’, ‘인싸용어’, ‘인싸들이 즐기는 핫한 ㅇㅇ’, 심지어 웬 수프광고에도 ‘인싸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처음 ‘인싸’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단순히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외향성, 에너지를 얻는 방식에 대한 의미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의 의미가 아닌 것 같다.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를 보았을 때, ‘인싸’는 소속되어 어울리는 사람, 내부에 있는 사람, 더 나아가 중심이 되는 사람을 나타낸다. ‘인싸’와 ‘아싸’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고, 사회는 ‘인싸’가 되기를 선망한다. 친구들은 나에게 말한다. “새말 너는 역시 핵인싸야!” 그렇다. 나는 다른 이들이 선망하는 ‘핵인싸’다. 성격검사를 해봐도 극 외향이 나오고, 사람들을 만나서 즐겁게 놀면 에너지가 생긴다. 매주 가는 모임만 4~5가지 정도이고,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곳, 소속된 곳을 모두 합하면 더 많아져서 세기가 어렵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좋아하고, 나도 사람들과 함께하는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다. 다른 사람들은 때때로 나를 부러워한다. 나의 밝은 에너지, 사람을 많이 사귈 수 있는 능력이 부럽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부러워할 만한 것일까?



  며칠 전 본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떠들썩한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돌아간 자리에 혼자 남아 외로움을 떨치려 몸부림친다. 그 장면을 보며 그의 마음에 공감했다. 각종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나는 때때로 쓸쓸해진다. 소리에 둘러싸여 있다가 고요해지면 그 적막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 안에만 있는 날은 침대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사실 나를 ‘인싸’로 만드는 요인은 나의 외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대체 왜 나는 외로울까? 심지어 충족되는, 행복한, 진심 어린 모임을 다녀와도 외로움은 잠깐 숨죽이고 있을 뿐 항상 어딘가에 존재한다. 이 외로움이 나의 몫이라는 걸 알고 있다. 모임을 더 늘려도, 보다 더 밀접한 관계의 파트너를 만들어도, 신을 더 찾고 붙잡아도 아마 이 외로움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에세이를 하나 읽었다. 생일날 모두가 축하 인사를 해주며 소중한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그날 만나자고 하지는 않아서 혼자 보냈다는 글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두려웠다. 나는 비혼, 비출산의 가능성이 높고, 언젠가 의지할 곳 없이 완전히 혼자가 되는 건 아닐까? 나이가 들고, 질병에 걸렸는데 내 곁에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부끄럽다. 이 두려움은 내 상상력의 부족 때문이다. 비혼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가 나에게 스며든 탓이다.



  이 외로움이 나만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다수 사람이 느끼는 보편적 감정이다. 우리는 외로움을 떨치려 다른 사람을 만나고 무리에 소속되기를 바란다. 무리에 소속되기 위해, ‘인싸’가 되기 위해 불평등한 상황에서 말하지 않고 참으며 버티기도 한다. 더 밀접하게 소속되기 위해, 혼자 남지 않으려고 결혼을 하고 가족을 만들기도 한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외로움을 위해 새로운 상상을 하고 싶다. ‘정상 가족’ 중심의 공동체를 넘어서 내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나만 행복하고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두 평안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어떻게 우리가 함께 즐거울 수 있을까? 그 균형점들을 찾아가고 싶다. ‘인싸’라는 단어가 ‘소속된’, ‘배제되지 않은’, ‘함께하는 사람’을 뜻한다면, 많은 사람을 ‘인싸’로 만드는 활동과 모임을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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