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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날것']36호_
구린 사회에서 '인싸'되기.

-오스칼네 고양이 



“여자애들은 안 돼.”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 자리에는 나와 그 말을 뱉은 남자 선배만이 있었다. 동아리의 미래를 위해 한참을 진지하게 얘기하던 자리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하여 고민하려던 찰나, 그 선배가 말을 이었다. “아, 물론 너는 빼고.” 

그 선배가 지칭한 소위 ‘여자애들’은 다음과 같은 속성을 지녔다. 열심히 하지도 않고, 조직 중심적이지 않고, 개인적이고, 자기 잇속을 먼저 챙기고, 연애하면서 조직에 타격을 입히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기도 어렵고, 모임에도 잘 안 나오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성적 관리에 집중하고, 어차피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기도 어렵고, 결혼하고 애 낳으면 끝날 애들. 

대화가 끝날 때 즈음에 나는 생각했다. ‘저렇게만 안 하면 그저 그런 여자애들로 보이지 않을 수 있겠군.’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너는 여자니까’, ‘여자애가 무슨’과 같은 뉘앙스의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단 하나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 외갓집 마루에 앉아 열심히 휘파람을 연습하고 있는 나를 가만히 보던 외할아버지가 “여자애가 휘파람 불어서 뭐에 쓰냐. 그만해.”라고 했던 것 정도다. 여자와 휘파람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건 내가 ‘여자애’라고 불린 최초의 기억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여자라는 이유로 내 행동을 제지하거나 내 존재를 규정한 사람들은 없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없다. 


그러나 대학에 와서는 내 성별을 인식하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아졌다. 주로 ‘말’이 문제였다. 여자가 여기 왜 왔냐는 말. 우리 학교처럼 여자가 소수인 공간에서는 대학 졸업 때까지 연애 한 번 못하면 ‘여자’가 아니라는 말. 너는 여자니까 글씨를 잘 쓸 거라는 말. 여자들은 자라오면서 성범죄에 대한 피해가 한 번씩은 다 있다는 말. 여자애들은 군대에 안 가도 되니 졸업이 빨라서 좋겠다는 말. 네가 일 잘하는 거 모두 인정하는데 여자라서 페널티가 있다는 말, 자신이 만나본 몇 안 되는 의리 있는 여자 동기라는 말 등등. 화자도 다양하고 그 맥락도 상이하지만 그 말들은 내가 여자라는 것을 의식하게 했다. 이 집단 안에서 나는 ‘나’ 이전에 ‘여자’로써 먼저 기능했다. 



“여자애들은 안 돼”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이 판에서, ‘여자인 나’는 그저 살아남고 싶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역시 안 되는구나’라고 말하는 상상을 하며, 그런 상황만은 절대 만들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렇게 하니 학교와 교회에서 여자들에게 가하는 일반적인 비아냥거림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회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고, 내부자(insider)가 될 수 있다는 표시인 것 같았다. 이 남성 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끝끝내 나는 아웃사이더 혹은 주변인(marginality)일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른 체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운동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남자 상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조직이나 운동보다는 개인의 삶을 더 중요시 여기는 거 같아. 나는 운동을 같이할 사람을 원해.” 이 말이 내게 충격이었던 건, 나는 소위 ‘개인적이지 않고 조직 중심적인’ 삶을 산답시고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쓰며 지냈기 때문이다. 내가 매일같이 야근하고 모임에 참여했던 것을 증거로 대며 항변했지만, 그는 나와 ‘운동적인 대화를 많이 못 했다’며 나와는 그런 대화를 하기가 어렵다 했다. 그 당시 그는 인턴으로 들어온 다른 남자 후배와 매일같이 ‘운동에 대한 논의’를 하곤 했다. 그가 볼 때 나는 ‘운동하는 사람의 태도’가 안 갖춰져 있었고 이 바닥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여자’라는 단어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지만 나는 또다시 “여자애들은 안 돼”라는 말의 늪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말에 분노하며 억울해했지만, 또다시 그 조직에서 필요한 사람의 모습이 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러다가 나는, 알고는 있었지만 절대로 인정하고 하지 않았던 사실을 끝내 인정했다. ‘아, 내가 있으려고 하는 이 바닥이 엄청나게 구리구나.’ 그리고 난 믿는페미에 가담했다. 



여전히 이 사회는 남성 중심적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남성이 아닌 이들은 모두 아웃사이더다. 그러니까, 나는 ‘아싸’다. 이런 구린 사회에서 ‘인싸’가 될 필요도 가치도 없다. 그런데 아직도 가끔 “여자애들은 안 돼”라는 말이 귀를 때리며 지나간다. 자꾸 ‘그저 그런 여자애들이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했던 관성에 끌려간다. 구린 사회에서 ‘인싸’가 되려고, 살아남으려고 했던 노력은 나를 구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기가 어렵다. 언제쯤이면 나를 규정하는 그 어떤 목소리에도 영향받지 않는 자유로운 ‘아싸’가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일단 이런 나를 이해해줄 안전한 사람을 만나 맛있는 걸 먹어야지. 아주 개인주의적인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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