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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날것'] 40호 

죽을 때 사람은 마른 나뭇가지 같아진다.

-새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멀게 느껴져서가 아니다. 죽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것이고, 신체로 느끼는 것이며,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상태는 괜찮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죽음의 상태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나,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걸 떠올리면 두렵다. 두려워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죽음과 가장 가깝게 있었을 때는 병원에서 일했을 때이다. 나는 호흡기내과 병동에서 1년간 간호사로 일했는데, 주요 환자는 폐렴, 폐암, 결핵, 기흉, COPD 등이었다. 연령대는 주로 70, 80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고 폐암의 경우는 중년 환자가 종종 있었다. 병동에서 사망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는데 크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폐가 완전히 망가져서 사망하는 경우와 비교적 젊은 환자가 폐암으로 사망하는 경우로 나뉘었다. 입원 치료를 장기간하고 병을 몇십 년간 앓다 보면 치료하는 것이 그저 생명 연장일 때가 온다. 죽음이 가까워져 온다고 판단이 되면 의사는 보호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고, 악화되어도 중환자실에 입실하지 않겠다는 동의서를 받는다. 동의를 받고 나면 인공호흡기를 달지 않은 상태에서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소를 공급하고, 증상을 완화시키는 약물 정도만 사용하고, 검사를 최소화하고, 마약성 진통제 등으로 통증을 강하게 조절한다.



  죽는 순간 대체로 환자는 의식이 명료하지 않다. 애초에 치매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고, 명료했던 사람도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잠을 자는 시간이 많아지고 통증에도 깨어나지 않는 상태가 된다. 흡인의 위험성이 크므로 치료상 금식을 하게 되고 소변량도 줄어든다. 환자가 사망하게 되면 우선 보호자가 옆에 있는지를 확인한다. 환자가 혼자 있거나 간병인만 옆에 있어 사망 후 1시간이 넘어서야 보호자가 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보호자가 모두 모이면 의사가 와서 사망 선고를 한다. 사망의 증거가 되는 심장 리듬 종이를 인쇄하고 환자의 몸에 있는 부착물 및 삽입물을 모두 제거하고 환자 앞으로 처방된 약품이나 물품을 반환하고 사망에 대한 기록을 작성한다. 보호자에게 사망진단서 발급에 대한 것을 묻고, 장례를 어디에서 하기 원하는지 묻는다. 잠시 후 장례지도사가 오면 보호자들은 장례식장으로 이동한다.



  다양한 죽음의 모습들을 보았다. 어떤 환자는 보호자가 병실이 꽉 차도록 모여 슬퍼하기도 하고 무연고자로 보호자 없이 있다가 간신히 찾은 보호자가 30년 전 연락 끊긴 누나 또는 저 사람 너무 미워서 돌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자식인 경우도 있다. 자식이 지극정성으로 옆에서 간병하는 중 임종을 맞기도 하고, 보호자가 계속 같이 있다가 하필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돌아가셔서 보호자가 슬퍼하는 경우도 있다. 놀랍게도 어떤 보호자들은 환자가 죽고 나서도 진상 행동을 한다.



기억에 남는 죽음은 장기 환자의 죽음이다. 입∙퇴원을 반복하는 내과의 특성상 모두 이름을 말하면 알고 있는 환자가 생기는데 그런 환자의 죽음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한 할아버지가 그런 경우였는데 무언가 처치를 하면 꼭 고맙다고 말하고 손이 제법 많이 가는데도 귀여운 할아버지였다. 죽음이 다가오는 걸 보호자들과 환자 모두 알고 있었다. 죽기 전날 딸들과 함께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말을 하면 산소포화도 수치가 많이 떨어지니까 말씀을 많이 하지 마셔야 한다고 말을 할 때 마음이 아팠다. 또 기억나는 죽음은 젊은 사람의 죽음이다. 내가 일하던 곳의 경우 40, 50대의 환자는 주로 암으로 사망하였다. 몇 달 전에는 걸어 다니던 사람이 온몸으로 암이 전이되어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엄청난 통증을 호소하고, 그 옆에 젊은 배우자와 어린 자식이 있을 때 무척 안타까웠다.



죽음이 다가올 때 많은 사람이 신을 찾고, 보호자와 시간을 보내고, 또는 찾을 존재가 없다.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죽음을 부정하거나, 아예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모른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어떻게 지켜질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죽고 싶을까? 난 주변 사람의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재작년에 어머니의 유방암이 재발했고 뼈로 전이되었다. 유방암 수술 후 13년 만의 재발이었다. 유방암 재발 생존율을 보지 않을 수 없었고 나는 기적이 모두에게 일어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았다. 어머니는 지금도 치료 중에 계시긴 하지만 많이 완화되었고 일상생활을 무리 없이 하고 계신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불안하고 어머니가 5년 후 생존해계실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다. 암으로 사람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 그 과정을 너무 많이 봐서 거기에 자꾸 어머니가 대입된다. 내 어머니가 그러한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너진다. 어머니가 없는 나날을 상상해 본다. 살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자 주변 사람들이 각자의 상실의 경험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냥 스쳐 지나갔던 죽음들이 더 깊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으며 시간이 흐르고 있고, 여전히 긍정적인 생각만 할 수 없지만 나는 결심했다. 만약 이별이 다가오면 가장 후회할 것 같은 일들을 하나씩 줄여보기로. 언젠가 이별이 찾아오면 물론 후회가 남겠지만, 최대한 서로 많이 웃고 좋은 기억을 많이 남기고 있다. 사실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 내과 병동에서 일한 나에게는 나이 든 사람의 죽음이 훨씬 자연스럽지만, 외상환자 응급실에서 일한 내 친구는 젊은 사람의 죽음을 훨씬 많이 봤다. 그래서 그 친구는 우리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나보다 더 많이 한다. 산다는 건 어쩌면 하루하루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피하다가 어느 날 문득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삶을 더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난 어떤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죽음 후에 무엇을 남기게 될까? 우리는 죽음 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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