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웹진 '날것'] 42호

그 ‘죽음’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도라희년


2018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2019년 새해를 맞이하기에 바쁘다. 이전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위해 각자가 의식을 치른다. 누군가는 새벽 일찍 출발해 산 문턱에서 해맞이를 하고, 누군가는 보신각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누군가는 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 한 해 동안 나에게 주시는 말씀 카드를 뽑기도 한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대로 묵은해를 떠나보내고, 희망과 새로움이 가득한(것이라고 믿고 싶은) 해를 맞이한다. 어두움이 가고 빛을 맞이하는 시점이다. 죽음이 가고 생명이 오는 순간이다. 


기독교 달력의 시작은 좀 다르다. ‘하나님께서 빛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시기’인 ‘대림(강림/대강)절’이 교회력의 시작이다. 대림절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많은 이들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을 기쁨이고, 축복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 성탄절은 더 이상 기쁨의 절기가 아니다. ‘마리아의 찬가’를 가지고 많은 목사는 마리아의 믿음과 예수 탄생의 의미를 설교하지만, 그 의미는 나에게 생명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예수가 무엇이기에 한 여인의 삶을 치욕과 어두움으로 몰아넣어 예수 탄생의 빛남을 강조하느냐 말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한다. 한 여인의 희생과 아픔, 인내가 있었기에 인류의 구원자가 나셨다고. 하지만 왜 항상 그 어두움, 차가움, 죽음의 역할은 여성에게 부과된 무거운 신앙의 몫일까? 그녀들의 고통과 희생을 통해 얻게 된 빛, 따뜻함, 생명의 삶을 당연하게 ‘대신’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녀들은 그남들의 삶의 의미가 돼줄 뿐, 정작 자신의 삶을 위해 살아본 적은 있을까? 


성서는 수많은 죽음과 그 위기 속에 있는 여성들의 삶을 얼마나,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성서에서 많은 남성은 죽음의 위기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해 살려주시거나, 죽더라도 그 죽음의 의미를 세밀하게 기록해 후대 사람들이 기념하게 했다. 반면 여성들이 죽음의 위기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신 경우도 많았고, 죽은 여성의 의미를 단 한 줄로만 사소하게 묘사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더 최악인 것은 여성의 죽음이 남성(연대)의 신앙을 영웅화하거나 잘못된 신앙을 미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미화’ 될 때이다. 이처럼 누군가에 의해 왜곡되게 해석된 죽음의 의미는 결코 생명으로 이어질 수 없다. 아니, 왜 죽음을 죽음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굳이 그 죽음의 ‘의미’를 해석해야 할까? 죽은 여성의 몸 그 자체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를 듣기는커녕, 한 여성의 죽음을 재료 삼아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라는 식으로만 소비되는 현실. 대체 얼마나 많은 여성이 죽어 나가야 이 세상은 정신 차릴까? 아니, 그들이 정신 차리는 방법은 여성의 죽음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일까? 여성들이 죽기 전에 정신 차리지 못한 뭇 남성들의 안일함과 해이함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일까? 


“어쩌면 성탄의 별이 오롯이 희망처럼 빛날 수 있는 이유는 짙고 검은 어둠이 장막처럼 세계를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욕망과 야만이 인간의 존엄을 짓이기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였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 별의 종착지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모습을 성서로부터 읽습니다.” 

(김신애 목사, “블랙 크리스마스” , <별을 따라가는 여성들>)


별의 종착지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모습을 성서로부터 읽고 싶었다. 그 중 ‘레위인의 첩’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사사기 19장에서는 레위인의 첩이라고 소개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를 ‘장인’이라고 명칭 하는 것을 보면 그녀를 첩이라고 하는 표현은 잘못됐다. 부인을 첩이라는 단어로 격하시킨 사사기 저자의 어떤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여성이 넉 달 동안 집을 나간 이유에 대해 2가지 전승이 있다. 하나는 “그 여자가 행음을 했기에” 또 하나는 “무슨 일로 그 여자가 화가 나서” 이다. 개역개정은 전자를, 표준새번역은 후자의 의미를 택했다. 많은 사람은 여성이 자신의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저런 재앙을 받은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하지만 ‘행음’과 ‘여성이 화가 나는 일’ 사이에는 격차가 크다. 만약에 전자가 맞는다면 왜 남편은 자기의 친정으로 간 여성을 다정하게 대하면서 다시 데려오려고 안달 났을까? 조심스럽게 가정폭력의 상황을 예상해 본다. 왜냐하면 지금 레위인이 하는 행동의 패턴은 가정폭력 가해자들의 행동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아마 여성은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도망친 것이고, 남성은 여성에게 화해하면서 친정집으로 간 여성을 다시 데려오려고 한 것이다. 아무튼 장인의 집에 간 레위인은 장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정작 그 안에서 당사자인 여성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레위인과 그의 아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어 유숙할 곳을 찾지만, 그들을 환대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 그들을 맞이하는 한 베냐민 사람의 집으로 갔지만, 그 안에서도 불량배에 의해 위기를 겪게 된다. 이때 남성들은 자신들이 처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의 몸을 거래하게 되고, 결국 레위인의 아내는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에 의해 성폭력을 당해 죽게 된다. 여성은 정말 잔인하게 죽어갔다.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밤새도록 성폭력 당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보지 않았다. 그 여자의 반쯤 죽은 몸이 문간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날이 밝자, 그남은 문을 열고 엎어져 있는 여성을 깨우는데 일어나지 않자 그제야 여성이 죽은 것을 알게 됐다. 더 소름 돋는 건 아내의 시신을 열두 토막 내서 각 지파에 돌린 그남의 반인륜적인 행동. 아내 덕에 자기 목숨을 부지했건만, 그남이 분노한 지점은 자신의 소유물인 여성을 건드림으로 자신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사유가 됐다고 판단한 그남은 기어코 전쟁을 치러 결국 베냐민 지파로부터 승리한다. 


사사기 해설가는 이 모든 상황을 “이스라엘에 왕이 없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하면서 이스라엘에 왕이 필요한 이유를 계속해서 어필한다. 과연 민족의 발전을 위한 대의명분이 개인의 복수와 불명예에 대한 응징으로 축소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정의의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을까? 여성의 죽음에서 그려지는 하나님은 모든 남성에게 배신당한 여성의 죽음을 외면하고 침묵한, 오히려 남성연대가 꾸려가는 전쟁을 정당화한 신으로 그려질 뿐이다. 레위인의 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애도하지도,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는다. 죽어간 여성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애초에 이 공동체의 목적에 들어가지 않았다. 폭력으로 난도질 된 그녀의 죽은 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강한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상상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죽음을 ‘이건 아니다, 잘못됐다, 정신차려라!’라고 의미화하는 것조차 그녀의 죽음을 납작하게 만드는 것 같은 죄책감 때문이다. 차라리 나는 그 당시 그녀가 느꼈을 여러 감정의 교차로 속에 참여하고 싶다.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탈출한 그녀가 달려가다가 숨이 차거나 넘어질 수 있으니 물과 밴드를 챙겨주고 싶다. 남편이 자기 아빠와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홀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죽어 울고 있었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같이 울며, 두려워서 떨고 있는 몸을 말없이 안아주고 싶다. 성폭력으로 반쯤 죽어가는 여성의 외면한 채 굳게 닫힌 문을 광광 두드리며 “니가 사람 새끼냐? 나와 이새끼야! 왜 너 때문에 여성이 죽어야 하는데? 비겁한 새끼, 빨리 나와서 살려달란 말이야!”라고 울부짖고 싶다. 레위인이 여성의 시신을 열두 토막 내기 전에 내가 그 시신을 가져와서 정성스레 싸매고 충분히 애도한 후에 장례를 치러주고 싶다. 여성이 왜 죽을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겨, 여성의 죽음을 왜곡하려는 남성연대의 시도에 저항하고 싶다. 여성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싶다. 같이 울어주고 싶다. 그리고 그녀의 삶에 생명, 빛, 따뜻함을 다시 찾아주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여성의 죽음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