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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페미인 이유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호명하게 된 건. 별 수 없이 남들은 지루할 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정확하게는 지지리 가난하고 고리타분한 사고에 갇힌 순진한 모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고 멍청하고 지저분한 여자 아이였던 나는 실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 사회에서 딸은 '여자'로 길러지기 때문에 돌봄의 부재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였으리라 싶다. 가난하더도 가난이 티나지 않아야 했는데, 나는 학습부진아로 '열등반'으로 분류되는데다 생선 비릿내 나는 더러운 아이여서 티가 안 날 수가 없었던 게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가 없었고, 그래서 성인이 된지도 한참인데 여전히 또래들과 지내는 게 익숙하지가 않다. 따돌림은 내 인생의 꼬리표가 되어 10대 후반이 되고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몇 해 전까지만해도 인간이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생명체인 줄 전혀 알지 못했다. 나에게 외로움이란, 감정이 아니라 모멸과 모욕을 속절없이 감내해야 하는 징벌 같았다.


각설하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업을 했다. 고3 때 아버지가 암환자가 되어 5년 뒤 돌아가셨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고, 애초에 내 평생 대학이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의 그 무엇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졸의 여성 노동자가 감당해야 할 몫은 내 취향의 것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더 열심을 보여야 하고 더 상냥해야 하며 더 친절해야 했다. 일단 그 역할에 순응하며 잘 이행하기도 했지만, 마음 한 켠에는 늘 '이건 내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편 교회에서의 나는 기 쎄고 말 많은 여자애였다. 번역하자면 '자기 주장이 강하고 자기 의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갈등에 취약한 한국교회에서, 나처럼 갈등을 회피하기는 커녕 해체하고 유발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욱이 나는 '여자애'였기 때문에 나의 발언은 전혀 위협이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귀찮은 존재쯤으로 치부되었다. 그렇게 점점 무력해져갔다.


그러던 중 난 또 기가 막히게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었고, 그 즉시 덕통사고를 당해버렸다. 가정과 사회에서 항상 주변부에 있으며 낮은 계급에 머물던 나는 속절없이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내 안에 켜켜이 쌓여온 경험과 사유가 어느 학자나 운동가의 글로 이미 정리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드디어 스스로를 스스로가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깨달았다. 나의 환경과 계급은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으면 못 배기게 되어 있었구나 하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바로 자유를 얻을 수는 없었다. 특히 새내기 페미니스트에게 기존 교회 공동체는 여전히, 더욱더 자신을 숨겨야 하는 공간이었다. 나를 표현할 언어는 부족하거나 미숙했고, 그에 비해 교회 안의 성별이분법과 가부장제는 너무 공고했으며, 나는 나의 미숙함을 이유로 페미니즘 자체가 공격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침묵의 댓가로 나는 더욱 가열차게 무력해졌다.


어느 날, 나는 무력한 와중에 용기를 내어 교회를 도망쳐 나왔다! 돌아보면 스스로가 너무 대견하고 기특하게 느껴지는 일 중에 하나이다. 조금 아쉬운 건 굳이 바로 다른 교회를 찾아 출석하기 시작했다는 거지만(하...) 그래도 앞선 경험을 토대로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에 정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안전이란 서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비판이 실천되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변형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 곳에서도 여전히 나는 가끔 피곤하고 귀찮은 대상 쯤으로 여겨질 때가 있지만, 변한 게 있다면 더 이상 페미니스트인 나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누군가 성차별적인 발언을 했을 때 바로 부적절하다고 지적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어린 여성이라고 해서 더 많은 감정노동을 할 필요가 없고, 내 존재 그대로 환대를 받을 수 있는 그런 공간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점차 나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번에 이런 공동체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아서였지만, 사실 이런 경험은 '행운'이 아니라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흔히 교회에서는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밑도 끝도 없는 평화와 포용이 강요된다. 무언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덕이 되지 않는다'는 말로 묵살 또는 거부된다. 그러나 내가 믿는 예수는, 기존 교회 체제와 문화의 문제를 먼저 인식하고 공유하며 격렬하게 저항한 사람이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고 말하며, 겉치레 평화보다는 오히려 능동적인 불화를 권장하였다.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이 페미니스트인 내가 여전히 신앙과 교회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밑바탕이며, 내가 #믿는페미 인 이유이다.


수많은 페미집단들이 있음에도 왜 또 다른 집단을 꾸리느냐는 질문이 있다면 내가 직접 나의 목소리를 내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 나의 필요와 선택을 대변하는 것이 더욱 매력적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는 원한다. 내 발언권이 더욱 강력해지기를 말이다. 그리고 주제 넘을지 몰라도 #믿는페미 를 통해 다른 이들의 경험과 발언또한 모였으면 한다. 닮은 듯 다른 우리의 경험을 하나로 통일시켜 버리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다. 더 다양한 목소리가 #믿는페미 안에서 함께하기를 기도한다.


열등의식에 주눅들지 말고 수려하지 못하더라도 감연히 우리의 선언을 외치고 싶다. 끊임없는 시행착오가 있을 테고, 그러하기에 후회에 낙망하지 않을 겸허함도 필요하겠다. 어설프더라도 솔직하게. 발랄하고 강건하게. 그저 내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황홀감을 파악하며 내 마음이 쓰이는 곳에 열과 성을 다할 뿐. 가보자. 우리의 행적들이 누군가의 삶의 필요를 채우고 선택을 돕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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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께더께

여성/빈곤/고졸노동자의 계급에서 결혼 한 방으로 남편있는 여자 계급을 획득했다. 분하다. 치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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