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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날것'] 14호
웃기고 싶어요. 그런데 페미니즘도 하고 싶어요. - 도라희년
희년 인생 28년. 나의 강점과 장점은 바로 남을 웃기는 것이다. 나는 사람을 웃기는 걸 좋아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로 인해 상대방이 박장대소하면서 기뻐하는, 행복해하는 모습을 통해 많은 에너지를 얻는다. 나의 모부 말씀에 의하면 나 어릴 적, 말도 못하는 아이가 ‘소양강 처녀’ 음악이 나오면 박자를 탔고, 말이 트이기 시작했을 때에 숟가락을 잡고 노래 한 곡을 뽑아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엄마, 아빠는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내가 있는 곳은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귀여운 나의 재롱에 어른들이 쥐어주는 만원의 지폐는 꽤 쏠쏠했다. 타고난 기질과 무대 위에 많이 서 본 후천적 경험이 더해져, 나는 공연을 하던지, 개그를 하던지, 행사를 진행하고 참여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남을 웃기는 방법은 크게 2가지이다. 누군가를 기가 막히게 흉내 내거나, 나 자신을 낮추거나. 나는 이 두 개를 참 잘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웃기려는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들은 박장대소하면서 꺼억 꺼억 눈물 흘리며 웃었다. 그런 반응에 힘입어 나는 사람들을 더 웃기기 위해 이야기에 MSG를 팍팍 첨가했으며, 할 수 있는 성대모사는 다 끌어왔다. 나의 뇌는 순간의 재치와 순발력을 발휘하게 해줘서 계속 웃길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었다. 이러다보니 선을 넘을 때도 있어서, 민망한 경험도 몇 번 했다.
그러던 나의 삶에 위기(?)가 찾아왔다. 페미니즘을 접한 후, 페미니즘에 집중하기위해 여러 여성 단체의 강의를 쫓아다녔고 장기교육을 받았다. 거기에서 만난 여성들은 늘 내가 관계 맺어온 사람들과 달랐다. 그녀들은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성을 대상화하는 농담과 관행에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이건 아닌 거 같아요.” “그 발언 불편하네요.” 나를 향한 말은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나의 말이 그녀들을 불편하게 할까봐 걱정이 됐다. 그리고 그 걱정은 현실이 됐다. 어느 단체의 사람 일부가 내가 평상시에 하는 말투나 단어 선택이 상당히 불편했었나 보다. 그래서 나는 자주 검열을 당했다. “희년은 언피씨해” 그 당시에 언피씨라는 말이 뭔지 몰랐다. 나를 향해 쏟아지는 언피씨라는 틀은 나의 발화를 막아버렸다. 그러다보니 말수는 줄어들고 늘 생각하고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언피씨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음” 이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발언이 나의 일상 언어에 투영됐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우스운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상당히 괴로웠다. 웃기는 걸 사명으로 생각하면 살아온 지 27년, 나의 인생에 큰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그래서 6개월 가까이 말을 아끼고 조용히 살았다. 남을 흉내 내는 건 그 ‘남’을 대상화하는 아주 못된 짓이었고, 나를 낮추는 것도 나를 대상화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도 웃길 수가 없었다.
“정말 사람을 웃기고 싶다. 하지만 나의 발언은 언피씨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대상화하면 희화화하고, 재현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늘 조심해야한다.” 이러한 자기검열이 페미니즘을 접한 후, 나에게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 돼버렸다. 사람을 웃기려면 페미니즘을 포기해야하고, 페미니즘을 하려면 웃기는 걸 포기해야한다니...! 정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라는 기도가 떠올랐다. 이 잔, 그 안에는 페미니즘이 담겨있다. 그런데 이를 선택하려면 나는 나를 부인해야한다. 남을 웃기고 싶어 하는 정체성을 버려야만 한다. 수개월 고민 끝에, 나는 결심했다. “페미니즘을 선택하고, 웃기는 걸 포기하리라.”
웃기는 걸 좋아하는 나의 정체성을 버려서 우울했지만, 선택한 페미니즘은 나의 삶에 꽤 유익했다. 하지만 즐겁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페미니즘 접한 후, 나는 다시 태어난 거야!” 그러나 몇 달 후, 나는 병에 걸렸다.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팠다. 이후 여성단체에서 만난 사람들과 호프집에서 오뎅탕을 먹고,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내 고민에 이렇게 답했다. “희년! 우리는 희년의 개그를 좋아해요. 희년 몰라요? 희년 주위에서 꺼억 꺼억 웃던 사람들을?! 그건 희년이 가진 장점이에요~ 사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퍽퍽해요. 그래서 우리들끼리 그런 얘기도 해요. ‘이제 페미니스트 퇴근하자!’ 그렇게 퇴근해서 원초적인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얼마나 필요한데요! 희년! 계속 웃겨주세요~ 희년답게 살아주세요!” 그 때, 그 동지의 말이 나를 살렸다! 2017년 12월 중반 정도로 기억한다. 비로소 나는 그 때, 나의 언행을 막고 있던 ‘언피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페미니즘 하면서 사람을 웃길 수 있다니! 우스운 사람이 아니라, 웃긴 사람이 돼도 괜찮다니! 가슴이 뻥 뚫렸다. 하지만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더 이상 남과 나를 대상화하며 희화화하려는 개그가 아니라, 누가 들어도 재밌는, 페미니즘 가치관이 반영된 개그를 나름 개발하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부족하다. 그래도 이전처럼 눈치 보지 않거나 나 스스로를 지나치게 검열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다보니 웃긴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러면 어느새 함께 페미니즘을 하는 나의 동료들이 깔깔 거리면 웃는 모습을 보게 된다. 행복하다. 살 것 같다. 그들의 웃음은 나를 힘나게 한다. 나의 에너지의 큰 자원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웃기고 싶다. 그래서 즐거운 페미니즘을 하고 싶다. 가끔 페미니즘 공부와 실천이 너무 힘들 때, 잠시 퇴근하면서 나를 돌보기도 한다. 내가 나를 건사해야 페미니즘도 힘내서 할 수 있으니까! 나는 목마르다. 페미니즘에 목마르고, 개그에 목마르다. 그 목마름을 채우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존재의, 내 삶의 이유이다.
믿는페미 웹진 '날것'은 매주 목요일 발행됩니다. 이번 웹진은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라는 주제로 필진들의 즐거움을 펼쳐내고자 합니다. 필진들의 즐거움이 이 글을 읽는 믿는페미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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