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날것'

[웹진 '날것'] 33호_ 인싸 중의 인싸, 핵인싸

믿는페미 2018. 10. 18. 18:44

[웹진 '날것'] 33호 

인싸 중의 인싸, 핵인싸
- 도라희년

“인싸 중의 인싸, 핵인싸” - 도라희년


 이번 웹진 주제가 “인싸아싸”이다. 나는 ‘인싸’와 ‘’아싸’ 중에 어떤 것을 지향하고 어떤 유형에 속하는 사람일까? 답은 간단했다. 나는 인싸 중의 인싸, “핵인싸”를 지향하는,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고, 중심에 서 있고 싶은 사람이었다. 핵인싸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정말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를 거듭했고 나와 상대방이 만족한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이를 악물고 했다. 그래서 난 내 인생에서 아웃사이더가 된 경험이 거의 없다. 이제부터 좀 재수 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재수 없는, 배가 불러서 하는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사실 난 핵인싸가 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산 사람이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1학년 1학기 때 반에서 5등 안에 들고 전교 등수는 20등 안팎이었다. 그때 당시 나는 보습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원장님이 좀 독했다. 한번은 내가 1학기 기말 때 수학 점수를 95점을 받았는데, 100점을 안 받았다고 해서 나를 혼내고 무시했다. 그 경험이 너무 치욕스러웠다. 자존심이 상해서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선포한 후에 독학했다. 그런데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서 책을 그냥 달달 외웠다. 1페이지를 다 외우는 데 3시간이 걸렸다. 암기하는 데 오래 걸려서, 나는 시험공부를 늘 시험날짜 3달 전에 준비했다. 2학기 중간고사 때 성적이 확 올랐다. 반 1등, 전교 5등. 그때부터 나를 대하는 선생님들의 평가와 태도가 달라졌다. 나의 까불대는 성격은 “활발한 리더쉽”으로, 시끄러움은 “언변에 능한”, 폭발적인 개그감은 ”교우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그리고 자주 교무실에 불려가서 책도 받고, 선생님들의 칭찬도 많이 들었다. 좋았다. 어정쩡한 인싸보다 완벽한 핵인싸가 되니까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고 칭찬해줬다. 그 이후로 나는 계속 핵인싸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했다. 중학교 때 이후 반에서는 늘 1, 2등을 했고, 전교 등수도 한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러던 내게 위기(?)가 찾아왔다. 서울로 집을 이사한다는 것이었다. 서울... 지방에 비해 엄청난 교육열과 그 수준이 다른 곳에 가는 건 내게 너무 부담이었다. 과연 그곳에서도 핵인싸가 될 수 있을까? 아싸가 되면 어떡하지? 불안했다. 인싸가 못 될까 봐 걱정됐다. 그리고 핵인싸가 되기 위해 시간과 감정, 노동, 재능 등 모든 것을 갈아 넣었다. 결국 나는 고독한 서울 생활 가운데에서도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때 전교 5등을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핵인싸의 계열로 들어갔다. 성적뿐만 아니라 반이나 동아리 활동에서도 항상 리더를 했고, 사람들을 웃기고 즐겁게 하면서 계속해서 나를 어필했다. 대학교 때도, 대학원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대학교 2학년 때, 무리한 다이어트로 힘이 없어 공부를 제대로 못 해 성적 장학금을 못 받았는데, 난 그때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대학교 시절 그때를 빼고 늘 성적 장학금을 받았기에. 그리고 못 나온 성적을 메우기 위해 공부에 올인해서 결국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대학원도 차석입학하고 수석 졸업했다. 핵인싸, 핵인싸, 핵인싸....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난 후, 또 불안해졌다. 학교 다닐 때는 나의 노력한 대가가 성적표라는 ’숫자’로 정직하게 명시됐다. 나는 그 숫자를 보면서 내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 핵인싸 유무를 판단했다. 그런데 학교 밖의 삶은 정확히 숫자로 표기된 성적표가 나오지 않았다. 때론 삶이란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정직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내가 애쓴 만큼의 수고에 비례한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인싸아싸를 구분 짓는 “성적표”가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부재하게 되자, 나는 한동안 꽤 방황했고 당황했다. 그래서 일단 닥치는 대로 노력했다. 안 되는 건 될 때까지 했다. 안 되는 게 되니까 나는 다시금 핵인싸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믿는페미 활동을 하면서도 그랬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휘저으라고, 나에게 요청되는 세미나, 논문 발표, 코미디쇼, 상담, 팟캐 게스트, 강의 등은 일단 OK 했다. 물론 좋아서, 의미가 있어서 한 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핵인싸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2달 전, 내게 “핵인싸”의 허무함과 덧없음에 대한 걸 느끼게 해준 사건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핵인싸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나의 과정들이 사실은 나보다 권력이 많은 사람의 말 한 마디에 별거 아닌 게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싸가 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았던 일,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나서 미움받아 ‘아싸’가 될까 봐 불의를 보고 참았던 일, ‘아무것’이 될 수 있는 일을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포장하며 내 노동과 멘탈을 갈아 넣어 핵인싸를 유지하려고 했던 일들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됐다. 그리고 더 이상 인싸아싸에 매이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그 결심 이후,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뭐라도 되겠지.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간에 내 소신에 따라 정직하게 행동하자. 더 이상 사람의 언행에 매이며 나를 지나치게 검열하지 않겠어!”


 신기하게도 이 통찰에 이른 후, 나의 삶은 꽤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핵인싸’를 지향했던 내 삶의 관성과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핵인싸를 위한 삶의 여정들. 그건 결코 간단한 일, 쉬운 일,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아니었다고. 공동체의 평안과 텐션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을 거듭했기에, 이제야 그것이 간단하고 쉬운 일,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된 것이라고. 그 ‘일상’은 결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 ‘일상’으로부터 떠나도 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전히 나는 나 그 자체로 그대로라고.”



*이번 웹진 주제는 '인싸와 아싸'입니다. 핵인싸의 이야기부터 자발적 아싸의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총 6주간, 여섯 필진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