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날것'

[웹진 '날것'] 32호 딸아, 네가 나를 괴롭히는구나

믿는페미 2018. 10. 11. 17:45


[웹진 '날것']

32호_ "딸아, 네가 나를 괴롭히는구나"  (믿는페미 '짖는 수련회' 설교문) 

- 오스칼네 고양이 



사사기 11장 30-40절 (새번역)

30. 그 때에 입다가 주님께 서원하였다. “하나님이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신다면, 31. 내가 암몬 자손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오는 그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번제물로 그를 드리겠습니다.” 32. 그런 다음에 입다는 암몬 자손에게 건너가서, 그들과 싸웠다. 주님께서 그들을 입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는 아로엘에서 민닛까지 스무 성읍을 쳐부수고, 아벨그라밈까지 크게 무찔렀다. 그리하여 암몬 자손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고 말았다.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에, 소구를 치고 춤추며 그를 맞으려고 나오는 사람은 바로 그의 딸이었다. 그는 입다의 무남독녀였다. 35. 입다는 자기 딸을 보는 순간 옷을 찢으며 부르짖었다. “아이고, 이 자식아. 네가 아버지의 가슴을 후벼 파는구나.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것이 하필이면 왜 너란 말이냐! 주님께 서원한 것이어서 돌이킬 수도 없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36. 그러자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입으로 주님께 서원하셨으니, 서원하신 말씀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이미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원수인 암몬 자손에게 복수하여 주셨습니다.” 37. 딸은 또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한 가지만 저에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두 달만 저에게 말미를 주십시오. 처녀로 죽는 이 몸,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가서 실컷 울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38. 입다는 딸더러 가라고 허락하고, 두 달 동안 말미를 주어 보냈다. 딸은 친구들과 더불어 산으로 올라가서, 처녀로 죽는 것을 슬퍼하며 실컷 울었다. 39. 두 달 만에 딸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주님께 서원한 것을 지켰고, 그 딸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으로 죽었다. 이스라엘에서 한 관습이 생겼다. 40.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산으로 들어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애도하여 나흘 동안 슬피 우는 것이다. 


 

입다. 그는 이스라엘 사사 시대의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성서는 그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길르앗이 창녀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사사기 11:1에 나와 있는 구절입니다. 입다의 출생은 분명치 않습니다. 그를 낳은 어머니는 창녀, 혹은 번역본에 따라 기생으로 불리는 여성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가문의 인물인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길르앗’이라는 지명이 그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예컨대, ‘한국의 딸, 고양시의 아들’과 같은 뉘앙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형제들로부터 쫓겨나 ‘돕’이라고 불리우는 땅에서 살았는데, 건달패들이 그를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제가 최근에 재밌게 본 드라마 중에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그 등장인물 중에 출신 때문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무신회라는 폭력 조직의 일원이 된 구동매와 유사한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입다는 자신을 내친 길르앗 사람들에게 다시 부름을 받습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길르앗 장로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통치자가 되어 암몬 족속과 싸워달라고 요청합니다. 실로 파격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입다는 그 조건을 수락하고 암몬의 왕에게 협상을 위한 사절단을 보냅니다. 협상이 이루어질 리 없었고 전쟁은 불가피했습니다. 그 시대에 영토를 빼앗은 전쟁은 흔한 것이었습니다. 사사기에서만도 많은 전투씬이 벌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난데없이 신께 서원합니다. 자신이 없었던 것일까요? 스스로의 삶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이기지 않으면 그 다음의 삶을 그려볼 수 없었기에,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서원을 했을 것으로 추측해봅니다. 그 서원의 내용은 자신이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할 때 가장 먼저 자신을 맞으러 나오는 자를 번제물로, 즉 불에 태워 바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얼핏 읽노라면 마치 셰익스피어의 비극 한 장면을 읽는 것 같기도 합니다. 태어난 고향과 가족과 부족으로부터 애초에 버림받고 건달패로 살 수밖에 없었던 자가, 전쟁이라는 기회를 만나 자기를 버린 부족의 통치자가 되고, 드라마틱하게 적을 물리치고 돌아온 이야기. 한 사람의 삶으로 보자면 인생 승리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의 삶에서 지금, 이 순간보다 짜릿했던 순간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그를 맞으러 나온 사람이 다름 아닌 그의 딸이었던 것입니다. 성서는 이야기의 비극성을 말하기 위해 그가 입다의 외동딸,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음을 언급합니다. 가장 즐겁고 짜릿했던 순간이 한순간에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 장면입니다.



성서는 읽는 자, 해석하는 자에 따라 천차만별로 읽힐 수 있는 텍스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를 입다와 그의 딸이 보여준 믿음을 칭송하는 이야기로 해석합니다. 입다는 하나님에게 서원한 것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그 일을 행했으며, 입다의 딸은 자신의 아버지가 마음 아파하고 있을 때 그를 다독여 스스로 하나님께 바칠 번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 이야기를 반면교사 삼아 하나님께 함부로 서원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훈계하듯 설교하기도 합니다. 혹자는 실제로 입다의 딸이 번제물로 바쳐진 게 아니라 신전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해석들이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입다의 경솔함에 왜 딸이 죽임당해야 합니까.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분노와 짜증이 차오를 뿐입니다. 

물론 외동 자식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는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장면이 버젓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어떠합니까. 신파도 그런 신파가 없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명을 받은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장작을 준비하고 이삭을 깨우고 먼 길을 떠나는 것부터 서술하더니, 중간 즈음에선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대사까지 꼼꼼히 적어놓았습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삭의 말입니다. 이 말을 듣는 아브라함도, 청자들도 그 비극적인 상황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서는 도착한 아브라함 일행이 제단을 쌓고 장작을 널어놓고 이삭을 묶어 그 위에 올려놓는 것까지 깨알같이 서술하고는 칼을 내려치려는 극적인 순간까지 몰고 간다. 바로 그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같은 상황, 입다의 딸이 번제물로 바쳐질 위기의 상황에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주님께 서원한 것을 지켰고, 그 딸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으로 죽었다.” 

고작 한 줄로 그 딸은 성서에서 영영 사라졌습니다. 신의 개입도, 준비된 번제물도 없었습니다. 그 딸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불린 적이 없습니다. 이 거대한 비극의 상황에서 에필로그라도 더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성서는 그다음 장면에서 딸을 죽인 입다가 그 후로 어떤 공적을 성취했는지 기술할 뿐입니다. 



여성이고 페미니스트이면서, 동시에 신앙인인 여러분. 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할 때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으십니까. 교회 구조 안에 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성서를 읽을 때도 우리에겐 괴로움의 연속입니다. 

특히 이런 구절을 읽을 때면 그 괴로움은 극에 달합니다. 성서가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담긴 텍스트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성서 구석구석에 이렇게 차별적이고 편파적인 시선으로 쓰인 저열한 기록들이 그들이 가졌던 한계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를 통해서는 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목숨을 살리고 대대손손 믿음의 조상이자 가문으로 세워갔다는 신앙적 고백으로 기록했던 이스라엘 사람들. 그들은 동시에 입다의 딸,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를 통해서는 오직 입다의 승리, 입다의 고뇌, 입다의 믿음만을 높였으며, 그것을 위해서 딸의 죽음은 고작 한 줄 요약만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변명할 필요 없이 성서의 많은 구절은 여성 차별적이고 사회적 약자의 입을 틀어막고, 그들의 존재를 삭제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건, 이 편파적인 기록 가운데에서도 입다의 딸은 흔적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 이전에 한 가지를 요청합니다. 그것은 두 달 동안 친구들과 함께 애통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성들, 넓은 의미의 자매들이었습니다. 입다의 딸은 자매들과의 연대를 구축합니다. 성서에서는 ‘실컷 울었다’라고만 기록하고 있지만, 그들이 산에 올라가 어떠한 이야기와 어떤 연대의 끈을 만들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입다의 딸이 죽은 후, 그 자매들은 하나의 관습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읽은 본문에서 증언하듯, 그 후로 이스라엘 여성들은 해마다 산으로 들어가 나흘 동안 입다의 딸을 애도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처음에는 입다의 딸과 동행했던 여성들뿐이었겠지만, 그 수는 점점 늘어났을 것입니다. 대대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대중적인 이스라엘의 관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곳에 남성은 참여할 수 없었고, 오직 여성들만의 연대체였습니다. 그들이 매년 나흘 동안 산에 올라 입다의 딸을 기억하면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슬퍼했을 것입니다.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났을까요. 아니, 분노했을 것입니다. ‘나도 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의 일이기도 하다’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이 일이 다시는 반복되면 안 된다고 성토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 문화를 바꿀 수 있는지 논의했을 것입니다. 한 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매년. 마치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일박 이틀 동안 함께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다짐했던 것처럼 그들은 3박 4일 동안의 모임을 만들어갔던 것입니다.

저는 입다의 딸이 여성 동지들, 자매들의 연대의 힘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장 놀라운 지점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여성들을 조직해냈습니다. 왜 함께 울어야 하는지, 왜 그것이 자신만의 비극이 아닌지 알렸습니다. 무려 두 달 동안 말입니다.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저는 종종 성서의 한계를 변호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와 신앙이라는 이 거대한 체계를 토대로 내 생각과 삶이 구축되어 왔다는 걸 깨달을 때면, 나도 모르게 이 체제를 그대로 옹호하고 구조에 부역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입다의 딸이라는 수식어로만 우리에게 알려진 그 용기 있는 여성이 ‘자매들’을 불러 모은 일을 기억하려 합니다. 내가 이제 죽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산에 올라가 나를 위해 울어주고 내가 당한 이 일을 기억해달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의 요청을 듣고서도 나는 과연 그를 죽인 이 체제에 부역할 수 있을까. 아니, 저는 그를 따라 다른 여성들의 손을 잡고 산을 오르는 길을 택하려 합니다. 


신앙은 무엇일까요. 성서에 쓰인 모순과 한계로 가득한 언어를, 일 획의 오류도 없는 하나님의 말인 양 숭배하는 것만이 신앙일까요, 아니면 그 속에 작게나마, 이름이 없을지라도 흔적을 남긴 작은 자들의 이야기를 읽어내고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지게 하고 그들 곁에 계셨던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일까요. 전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는 그저 이 자체로 균형 잡히고 차별 없는 책이 결코 아닙니다. 성서를 풍성하게 하고 균형 있게 하고 차별 없게 만드는 것은 숨겨진 이들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우리의 투쟁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 잊힌 이들의 증인이 되겠습니까.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입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고 마치려 합니다. 입다는 전쟁에서 돌아와 제일 먼저 딸을 발견하자, 탄식합니다. 그런데, 그가 내뱉은 말이 참 황당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것이 하필이면 왜 너란 말이냐’. 다른 번역본에선 이렇게 서술합니다. ‘너는 내게 재난을 갖다 주는 자가 되었구나.’ 입다가 만든 상황으로 인해 괴롭힘당하고 재난을 당하는 쪽은 딸인데도 불구하고, 입다는 자신의 편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는 딸의 입장, 여성들의 입장에선 다소 억울하긴 하지만 그게 그들이 지닌 시선의 한계이니 어쩌겠습니까. 그들의 말대로 더 적극적으로 괴롭혀주는 수밖에요. 

딸아, 네가 나를 괴롭히는구나. 이것은 입다의 말이지만, 지금 우리를 발견한 교회, 권력 잡은 이들, 자신들의 시선을 바꾸려 하지 않는 뭇 남성들, 이 사회의 한탄 섞인 비명이기도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괴롭힙시다. 성서 그 아래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이 구조를 변화시킵시다. 그들이 우리를 마녀다 죄인이다 하면 기꺼이 죄 지읍시다. 메리 데일리가 얘기했던 보는 용기, 존재하는 용기, 죄짓는 용기를 가지고 길 밖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페미’인 이유입니다. 입다의 딸과 함께 죽임당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