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날것'

[웹진 '날것']29호 난 이거 할래

믿는페미 2018. 9. 13. 20:15

[웹진 '날것'] 29호

난 이거 할래

- 달밤


 한 번 썼던 기억이 있지만,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 내가 들은 말은 “안 어울리는데”, “수녀 같은 언니, 잘 어울린다!”, “좋은 목사님을 만나 사모님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였다. 저 세 가지 반응에 대응하는 이미지는 각각 어떤 것이었을까. 당차고 무게감 있는 남자 부흥사를 떠올렸을 수도 있고, 수녀 같은(나는 가톨릭계 미션스쿨에서 공부했다) 신실한 이미지를 떠올렸을 수도 있고, 사모는 어떤 이미지인지 모르겠지만 여튼.. 있고. 


 고등학교 때까지 나에게 대학과 전공선택이란 너무 뜬구름 같아서, 과학을 공부하겠다고 이과에 들었다가 수능은 문과로 보고 대학선택은 그 이후에 했다. 부모님이 서원하고 평생을 기도하며 준비해서 신학교에 입학한 사람과는 전혀 딴판인 것이다. 나는 딱히 무언가 ‘되고자’ 하지 않았고 ‘무얼 공부할까’를 생각했었다. 순진하게도 대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줄만 알고. 


 학교에 들어가 보니 공부를 너무 좋아해서 천재 소리를 들으며 강의하는 교수님, 진짜 이상한 말만 하는데 무슨 줄을 타서 강의하는 거지 싶은 교수님,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면서 익숙하게 학생들을 조련하는 교수님, 유학에서 막 돌아와 뭔가에(!) 불타며 학생들 절반에게 F를 주는 교수님 등 다양한 분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목사가 될 사람’으로 대했다. 동기들은 이미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거나 간사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별생각도 없이 중등부 교사로 차출된 터라 이게 뭐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는데, 선배들은 교회에 나가서 전도사 사역을 하며 목회를 배우고 학비를 벌어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그때도 이미 로열 클래스가 있어서, 소위 잘 나가는 동기들이 주로 사역하는 교회는 정해져 있었다.


 이방인의 나라에 온 것만 같았던 나는 어쨌건 내가 듣고 싶은 수업을 실컷 들었다. 4학년이 신청하라고 되어있는 <어거스틴의 고백록> 강의에 들어갔다가 나처럼 의욕만 앞선 동기들과 만나기도 하고, 폐강 위기로 간당간당한 신학 사상사 세미나 수업에 들어가 진땀을 빼기도 하고, 철학수업과 조직신학, 목회상담 과목을 신나게 들으며 어떤 갈증을 해소했다(성적은 좋지 않았다). 와중에도 신학생들이 모여 가난하고 집 잃은 사람들을 위해 활동한다는 동아리를 찾아 들어갔다. 신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이 이 사회의 약자들을 찾아가고 만나는 활동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게 느껴졌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지,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고, 내가 공부하는 이론과 사상의 마땅한 실천은 이렇게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또 순진하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가부장적인 동아리였는데도, 그때는 뭘 모르고 마냥 열심히 했다. 어쩌면 나는 그때 ‘어떻게 살까’를 고민했던 것 같다. 


 학부를 졸업하고 대부분의 동기들은 대학원에 진학했다. 석사과정을 마쳐야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신학교에 입학할 때 이미 대학원 졸업까지를 염두에 두고 온다. 나는 학교가 지겨워져 진학을 미루고 직장에 취직했다. 운이 좋게 기독교계 운동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 일을 하며 만난 동료들과 페미니즘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벨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도 그 때 읽었다(정희진 선생님의 글은 반도 이해를 못했다). 우리는 기독교계 운동단체 내의 가부장적인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운동계가 교회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태도와 질서에 대해 이야기했다. 


 눈을 돌려보니 교계 내에서 여성운동을 하는 선배들이 이미 여럿 있었다. 학교에서는 총여학생회를 만들고 교계에서는 여성 목사 안수와 성차별적인 교단법을 두고 싸우고,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며 여성 지도력을 길러내고자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나도 이런 운동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동지들을 모으고 운동을 제안했다. 자금도 없고 세력도 없지만 글 쓰고 말하는 거라도 해보자고. 우리는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하고 운동에 대해 고민하고 글을 쓰고 방송을 했다. 하나둘 동지들이 모여 이런저런 운동이 더해졌다. 교회 다니는 여성들에게 교계는 너무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넘쳐나고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가 뭘 할지,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를 고민하며 산다. 또 나는 앞서 운동하던 선배들이 만든 여성단체에 합류해 일하고 있다. 열악한 재정에, 이 분야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떠맡아 헤쳐나가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그 오랜 분투가 헛되지 않도록 잘 배우고 짐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미지에는 힘이 있지만 어떤 힘은 사람의 가능성을 제한하기도 한다. 강한 목사, 수녀의 전형적인 이미지, 사모(남자 목사와 결혼한 여자 사람일 뿐이지만) 모두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고 대부분 성역할과도 관련이 있다. 강한 목사는 남성의 몫으로 분류되어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고,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여성 신도나 사모의 이미지는 여성에게 강제된다. 나는 이런 이미지들의 부정적인 힘이 사람을 가두고 스스로를 무엇 ‘되기’에 골몰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목사 되기, 사모 되기, 순결한 신부 되기 등등. 나는 우리가 무엇이 ‘될까’보다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할까’에 더 집중하면 좋겠다. 여자 되기, 또는 남자 되기에 서로를 제한하지 말고, 순결하고 신실한 자녀 되기에 너무 갇히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