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날것'

[웹진 '날것']23호 몸, 그리고 나.

믿는페미 2018. 8. 2. 18:25

[웹진 '날것']23호 

몸, 그리고 나. 

-폴짝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내 몸을 떠나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무엇인가에 비치지 않은 나의 몸을 완전하게 응시한 적이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까? 너무 당연해서 이상한 이야기일까? 

 나는 내 몸을 생각하거나, 몸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답답하다. 마치 어딘가에 갇혀있는 것 같은 답답함이다. 몸은 껍데기이고 그 안에 나의 영혼이나 생각이 다른 주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혹은 지금의 몸은 내가 선택하지 않고,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낀다. 나는 ‘몸과 영이 분리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몸과 영 중 무엇이 더 의미 있는가’와 같은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나의 몸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그 무엇보다 ‘실체’적인 나의 몸을 보이지 않는 무엇, 혹은 중요하지 않은 무엇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아마도 나는 ‘보이는’ 것이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그것을 중요하지 않다고 치부함으로써, 나의 몸으로부터 때로는 다른 사람의 몸을 보는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내 몸과 거리를 두며 지냈다. 지금보다 몸의 무게가 덜 나갔을 때도 그랬고, 꾸준히 무게를 늘려온 지금도 그렇다. 물론 몸의 무게에 따라 스스로의 몸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늘 분리되지 않는 내 몸을 저 멀리 떨어뜨려 놓은 채 ‘나’로 살기를 원했다. 

 내가 몸과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온 세월 동안, 곧 내가 ‘나’로 지내온 시간 동안 아마 내 몸은 단 하루도 똑같았던 적이 없을 것이다. 매일 먹고 마시고, 100년 만의 더위에 땀 흘리는 나의 몸은 당연히 어제와 같을 수 없다. 시간마다 내 몸은 성장하거나 노화했을 것이고, 또 시간마다 무게와 형태가 변화했을 것이다. 매일 매일 변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따라 변해야만 하는 내 몸은 그 자체로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이자 때로는 생을 이어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당연한 몸의 변화가 내가 몸을 답답하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일 때가 많다. 청소년 시절 집에서는 동생에게 “뚱뚱하다”거나 “찌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학교에 가면 몇몇 친구들이 “몇 킬로그램이야?”라고 물어봤다. 당시 나는 지금과 같은 키에 50kg이 되지 않았는데 친구들이 “50kg도 안 되지?”라고 물으면 새침데기처럼 보일까 봐 50kg은 넘는다고 애매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동생의 “뚱뚱하다”는 말에는 “내가 그렇게 이상하고 부끄러운가?”라고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외모에 민감했던 어떤 친구는 내가 조금 살이 찐 것 같으면 “등살이 좀 붙었네”라고 지적했고, 어쩌다 살이 빠지면 “부럽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같은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평가를 받았고, 조금의 변화에도 크고 낯선 반응을 마주했다. 외모에 대한 관심은 으레 ‘청소년기’의 특징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어른들은 사회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은 청소년의 것이 아닌 것처럼 굴거나, ‘대학 가면 살도 빠지고 예뻐진다.’며 획일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 과정을 겪어온 내가, 그리고 대한민국의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분리되고 싶다거나, 자신의 내면에는 ‘완벽한’ 몸을 가진 또 다른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나는 결코 특별하거나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몸은 계속 변해왔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어쩌면 조금씩 변하고 있는 중이겠지만 단 한 번도 ‘살아있는 몸’이 어떤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특히나 여성의 몸은 언제나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잣대로 평가되며, 노화되면 아름답지 않고, 섹슈얼하지 않은 존재로 치부 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여성’의 몸은 박제되어있다. 

 나는 몸의 무게가 늘어난 뒤 많은 것을 얻었다. 쉽게 가랑이 부분이 찢어지는 바지와 다리의 튼 살, 구부정한 자세 때문에 살이 접혀 생긴 배와 가슴 사이의 선 등등.... 그리고 동시에 나의 살들은 내가 겪는 많은 일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월경통이 심해진 것, 무릎이 아픈 것, 머리가 아프거나 소화가 되지 않는 것, 예민하게 구는 것, 땀이 나거나 숨이 차는 것, 다친 발목이 쉽게 낫지 않는 것도 다 내 몸에 있는 ‘살’들이 무겁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말들은 아주 그럴듯하고, 타당한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나의 몸을 향한 이런 시선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가 많은 것을 ‘얻었’지만 그것이 사실 무언가를 ‘잃은 것’이라고 느끼게 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내 몸은 살아있다. 살아있는 것이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이제 내 몸과 화해하고 싶다. 나랑 일 분 일 초도 떨어져있지 않아서 괴로운 나의 몸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몸의 변화를 ‘얻거나 잃는’ 나와의 싸움이 아니라 나의 역사라고 여기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