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날것'

[웹진 '날것'] 35호. It's me.

믿는페미 2018. 11. 1. 19:30


[웹진 ’] 

35_ It’s me .      

-폴짝


 이름은 하나지만 별명을 여러 라는 동요처럼 나도 여러 별명으로 불렸다. 내가 ''에게 받은 성이 '' 덕에 어린 시절 별명은 남자, 남대문 같은 '' 들어가는 모든 것이었다. 이런 유치한 별명 말고도 나는 보노보노, 잠만보, 나몌( 이름을 빠르게 발음하면 이런 발음이 된다고 한다.) 같은 별명들로 불렸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신박했던 별명은 '()'폴짝이었다. 동아리방에 친구들과 앉아있었는데 친구 한명이 이야기했다. “폴짝은 남폴짝이 아니라 난폴짝이야. 얘는 이해를 하겠어.” 이전의 별명들은 내가 닮았거나, 내가 부에게 받은 성씨에 관한 것이었는데 난데없이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이라는 별명이 생겨버렸다. 이후에도 종종 친구들은 이야기나 상황을 듣고 나서역시 난폴짝이야이라고 이야기했고, 때마다 나는내가 그렇게 이상한가?’ 혹은내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애초에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쓰지만,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혹은 이해받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은 아니라고 결론을 지었다. 


 나는 집에서도 약간 별종 취급을 받곤 하는데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그랬다. 동생들은 밖에서 사고를 번씩 당했는데 어째서인지 나는 넘어져 생긴 무릎 흉터만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모부에게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 


너는 어릴 때부터 혼자 노는 좋아했어. 동생들은 밖에 나가서 놀아도 너는 집에 있는 제일 좋아했어. 집에서이건 엄마 동그라미, 이건 아빠 동그라미, 이건 폴짝 동그라미, 이건 동생 동그라미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스케치북에 동그라미 그리면서 노는 제일 좋아했다니까.” 


 혼자서 동그라미 그리는 최고의 놀이였던 어린이는 자라서 청소 시간이면 교실에 있는 티비장 뒤에 들어가 헤드폰을 쓰고 혼자 인디 음악을 듣는 청소년이 되었고, 시간이 흘러서는 나랑 노는 제일 재미있어서 혼자 영화 보고, 혼자 여행하는 좋아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의 이런 성격은 단순히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이상으로 세상, 집단(공동체), 타인들과 관계 맺는 방식, 그리고 이해하고 이해되는 일련의 과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모임이나 집단 안에서 나는 중심에 서기보다 변두리에, 뒤에 있는 것이 편안하다. 앞에 나가서 이야기하는 싫어하지도 않고, 이야기를 하는 편도 아니지만, 굳이 선택하라면 나는 한발 물러서 있는 것이 좋다. 나는 혼자 노는 방법 중에서도 무언가를 관찰하는 좋아하는데 집단 안에서도 비슷하다.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게임이나 만화에서처럼 사람들의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오르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말풍선 안에 들어갈 내용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런 관찰력은 내가 애정하고 아끼는 공동체에서는 민감하게 발휘된다. 진행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없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필요한 것을 바로 전달하는 것은 스스로를 굉장히 기특하게 여기는 포인트가 된다. 이런 나에게는 사람들을 웃기거나 주목을 받는 일보다 다른 사람을 웃기는 놀라운 재능이 있는 (희년같은) 사람을 보고 웃는 좋고, 가만히 일을 하는 기쁘다. 그래서일까 나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수련회 뒤풀이나 엠티같은 가면 초반에는 어울려서 놀다가 어느 순간 보면 멀리 떨어져서 다른 일을 하거나, 자러 가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경계가 분명한 사람이다. 경계는 심리적인 거리와 물리적인 거리가 모두 포함된다. 내가 싫어하는 하나는 에스컬레이터나 계단에서 뒷사람, 사람과 공간 없이 붙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상 거리를 두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선다. 나에게는 계단 , 에스컬레이터 칸이 일종의 보호막 같은 것이다. 침해, 오염, 방해받지 않을 권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칸이 뭐라고 누군가 위로 아래로 움직여 나에게 다가오면 너무 괴롭다. 그러니 거리를 걸을 때도 돌아가도 사람 없는 길로 다니는 것이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이런 경계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는데, 관계 초반에는 마음을 편하게 열지만 거기까지인 경우가 많다. 깊은 관계까지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다. 관계라는 것은 어쩔 없이 애쓰고, 돌봐야 하는 것인데 언젠가부터는 소모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했고, ’자연스러운 관계 추구한다는 명목하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인위적인 것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편으로는 내가 아무리 나를 이해시키려고 해도 어차피 이해 못할 거라는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도 있는 같다. 마음을 열고 생각을 나누면너무 예민하다 거부를 당할 같기도 하고, ‘ 별거 없구나라고 여길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세상을,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애써온 시간은 역시 있는 그대로 이해받고 싶었던 시간들은 아닐까. 


  글을 여기까지 읽은 고마운 당신은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 폴짝은 아싸구나!’. 하지만 나는 아싸와 인싸라는 이야기가 불편하다. ( 부분에서역시 아싸였어!!!’라고 확신을 가지게 되려나...) 아싸와 인싸 사이에 미묘한 계급이 나누어져 있는 같아서도 그렇고, 나에게는 아싸라는 단어가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가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사회성, 눈치 같은 것들의 결핍, 결여와 연결되어 있어서도 그렇다. 모든 사람이 센스나 눈치가 있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데 은연중에 그래야 한다고 강요받는 느낌이랄까. 나는 이런 불편함은 비단 인싸와 아싸뿐 아니라 MBTI 에니어그램에서도 느낀다. 사람을 이해하는 도움이 되는 부분도 많지만 때로는 나에게 유형의 스테레오타입을 기대하는 경험이 있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유형이니까 당연히 그럴 알았어’, ‘ 유형이니까 그런 거야라거나 반대로 유형은 이런 너는 그러네 같은 말들은 나를 옥죄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무 아래 홀로 앉아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바라는 살아가는 것은 나다움을 찾아가는 것에 있는지 아니면 다움 탈피하는 것에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