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날것'

[웹진 '날것'] 34호 PPT PRINCESS

믿는페미 2018. 10. 25. 17:02


[웹진 '날것'] 34호 .
PPT PRINCESS
- 쏘네치카 


 스무 살이 되자마자 청소년 복음캠프의 스태프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내 자리는 스크린에 PPT를 전송하는 노트북 앞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 복음캠프 포스터를 본뜬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템플릿 위에 예배 인도자가 알려준 콘티대로 내용을 작성했다. 예배가 시작되면 순서에 따라 PPT를 넘기는 게 내 일이었다. 나는 그 쉬운 일들 위에 쉬운 일 한 가지를 더 했다. 순서와 순서 사이마다 캠프 책임자들이 안내한 것들에 내 말을 몇마디 덧붙여 화면에 띄워두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은 30분까지입니다. 모두 화장실에 다녀오세요. 안 마려워도 가면 나옵니다...” 

 그럼 이제 막 얼굴을 알게 된 동생들이 다가와서 한 번씩 웃으며 칭찬이나 농담 한마디씩 던지고 갔다.


 다소 즉흥적인 것들이 많은 둘째 날 밤의 레크레이션 시간에는 신이 났다. 사람들이 준비한 것들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 즐거움에 숟가락을 얹어보았다. 각 상황에 따라 인터넷 짤들을 찾거나 재미있는 문구를 써서 화면에 띄우면 이 센스는 누구의 것인지 알기 위해 PPT 자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캠프 측 대표 목사님이 나중에 말하기를, 사실 쏘냐가 앉은 자리는 가장 조명받지 못하는 자리라고 했다. 강당의 맨 뒤에서 묵묵히 작업하고, 캠프에 참여한 청소년들과 대화를 나눌 일도 없으니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성실하게 타이밍을 재며 화면을 넘기면 되는 것이라서 지루한 나머지 딴생각을 하다가 화면을 넘기지도 않는 일들이 잦았다고 한다. 그런데 쏘냐는 그 일을 아주 즐겁게, 열심히 했으니 그 목사님뿐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맡은바 잘 해내고 좋은 인상마저 남긴 소네치카, 그곳에서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같은걸 느꼈다.


 둘째 날 저녁 식사 후의 예배에서는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었다. 찬양 인도자가 콘티에 없던 찬양들을 부르기도 한다. 내 옆자리의 방송팀장 간사님이 내게 인터넷에서 악보를 검색해 띄워두라 하기에 그렇게 했더니 내 손이 잠시 할 일을 잃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모니터는 두 개였다. 하나는 화면에 띄워지는 모니터, 하나는 내가 작업할 수 있는 모니터였다. 나는 악보에 보이는 찬양 가사들을 독수리타법으로 PPT에 옮겨 적었다. 일단 처음부터 적으면서 찬양팀이 부르고 있는 구간의 가사까지 적으면, 그 부분부터 PPT 화면을 띄웠다. 찬양이 다음 구간으로 넘어가기 전에 다음 가사를 적어 타이밍에 맞춰 넘겼다. 사실 어쩌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찬양이라서, 또 그냥 악보를 띄워놔도 보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는 것이라서 아무도 내게 요구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예배를 드리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맡은 바를 즐겁게, 좋은 결과를 향해 가는 것.


 일을 잘 해냈다는 성취감,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기쁨으로 나는 무언가 더 하고 싶었다. 그 캠프에는 쪽지 종이들이 준비되어있었다. ‘몇조의 누구에게’라고 겉에 쓰면 나중에 사회자가 전달해주는 쪽지 상자도 있었다. 이름과 얼굴만 겨우 외우는 청소년들에게, 스태프로 참여하며 조금 알게 된 사람들에게 썼다. 하나님이 정말 정말 사랑하는 누구에게, 조장으로서 수고해주고 있는 누구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함께하듯 나도 당신의 어느 순간에 함께하게 되어 기쁘다고 썼으며 앞으로도 당신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행복하길 바란다고 썼다. 펜을 잡을 때 힘을 주는 버릇이 있어서 손목과 손가락은 좀 아팠지만, 내용을 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의 근황 한 두가지 정도, 그리고 내가 본 그 사람의 모습과 그 사람이 지나가며 말한 한 두 가지, 그리고 하나님의 어쩌고 축복의 말을 이어 적으면 내용은 흘러넘쳤다. 인사만 몇 번 나눈 동생이 복도를 지나가다 나를 마주치고서는 활짝 웃으며 “언니 쪽지 잘 받았어요.” 그렇게 말할 때 내 마음은 활짝 피었다. 몇 마디의 글을 적어 한 사람에게 건네는 일은 그렇게 소중했다.

나는 그 쪽지에 ‘ppt 공듀로부터’, ‘from. ppt princess’, ‘ppt 공주가 누구누구에게’ 같은 문구들을 적었었다. 처음엔 ‘피피티 요정’혹은 ‘피피티 여신’으로 스스로를 칭하려다가 하나님은 왕이시고, 난 그런 하나님의 딸이니까 공주가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공주라고 칭했다. 몇 사람들은 나를 정말 공주님이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내가 그곳의 인싸는 아니었다. 기분이 좋으면 활짝 웃을 줄도 알고, 사람들을 관심 있게 보며 쪽지를 쓸 줄도 알지만, 일상적인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어렵다. 친해지기 위해 말을 거는 것은 기괴하다고 가끔 생각할 만큼 그런 대화가 어렵다. 본론이 없는 대화, 뭘 어쩌자고 물어보는 것인지, 이 이야기를 나한테 왜 하는지,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길 원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은 모든 대화가 내게 어색하다. 가령 “점심에 맛있는 거 나왔으면 좋겠다. 어떤 음식 좋아해?” 같은 질문을 들으면, 해물이나 달콤한 디저트 종류들을 좋아한다고 대답은 하겠지만 음식에 대한 대화는 그걸로 끝이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음식을 좋아할지 궁금하지도 않고, 당장 배가 고프면 물이라도 한 컵 떠마시며 속을 달래면 될 것을 왜 점심시간 메뉴에 대한 기대를 내게 표현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다만 그렇게 말을 거는 것이 일종의 친근한 표현이고, 나에 대한 호감도 조금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알아서 그게 고맙고 좋아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다. 가끔은 당신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 되묻기도 하지만, 대답을 듣고 나면 다시 할 말이 없었다.

 복음캠프에서 뿐 아니라 내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비슷하다. 그래서 피피티 자리가 참 좋았다. 피피티 프린세스로 스스로를 칭하되 인싸라는 왕관을 쓰진 않아서, 그래서 왕관의 무게를 견딜 필요도 없기 때문에 좋았다. 반짝이는 옷을 입고 모두에게 손을 흔들며 돌아다니지 않아도, 그러니까 누구와 농담을 나누거나 번호를 교환하는 등의 노력 없이도 모두 내가 피피티 공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여담으로, 그해 친구와 다녀온 상담 카페에서 내 성격 유형은 ‘공주님’ 유형과 ‘외톨이’ 유형이었다. 유형 결과에 대해 해석을 해주던 직원은 내게, 공주님이 외톨이라서 어떡하냐 말했었다. 그러게 참 이상하고 웃긴다 생각했었는데, 공주님인 동시에 아싸로 살아가는 법을 잘 찾은 것 같다.

난 내가 ‘인싸같은 아싸’이길 원한다. 난 당신들의 이름과 얼굴, 사사로운 근황들을 기억하고, 인사도 반갑게 하지만 당신들에게 카톡을 보내지 않는다. 당신들 역시 내게 카톡을 보내거나 전화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가끔 외로울 때 서로에게 연락할 수 있으며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다. 나는 주제가 있는 상황에 강하다. 나란 인간과 당신이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나눌 수 있다. 요즈음 내가 꿈꾸는 것과 고민하는 것들에 대해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당신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 그런 대화 중에 가끔 감동을 받고 메모 앱이나 다이어리에 적기도 한다. 당신이 이런 내 모습을 좋아할 걸 안다.


 지금 살아가는 방식이 참 만족스럽다. 사사로운 대화에 서툴다는 점은 인간답다 느껴져서 좋고, 옆 사람에게 반드시 말을 걸어 어색함을 해소할 필요 없는 것이 강하고 성숙한 사람의 그것 같아서 좋다.


 이 복음캠프에 피피티 공주로써 6번 정도 참여했다. 들뜬 마음도 차차 가라앉아서 쪽지를 아무에게도 안 쓴 날도 많았으며 지금 피피티 자리는 다른 친구가 맡았지만, 여전히 그곳을 떠올리면 ‘내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인싸같은 아싸’ 역시 그런 것 같다. 상황의 중심은 아닌 어딘가에 소네치카가 있다. 가끔은 그 중심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나기도 하며, 또 가끔은 그 중심에 가 있기도 한다. 하지만 변두리 어딘가는 확실히 쏘냐의 자리다. 그곳에서 즐겁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